[[분류:1901년 출생]][[분류:함흥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계 러시아인]][[분류:195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파일:external/img.newdaily.co.kr/art_1298872685.jpg]] 朱世竹. [목차] == 개요 == [[1901년]] [[6월 2일]] - [[1953년]]. [[한국]]과 [[소련]]의 공산주의자. 한국의 항일운동가. == 생애 == [[함경남도]] [[함흥]]의 넉넉한 집에서 태어났다. 함흥의 영생여학교[* [[개신교]] 계통의 사립학교로 1903년에 창학하였다. 자매품(?)으로 남학교인 영생중학교도 있었다. [[북한]]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가 1990년 [[수원시]]에 [[수원영생고등학교|영생고등학교]]란 이름으로 교명을 이어 받았다.]를 2년 다니다가 [[경성부]]로 유학하였다. [[3.1 운동]]에 참여했고 1921년 [[상하이]]로 피아노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났다. 이 때 상하이에서 [[박헌영]]과 [[김단야]]를 만났고, 1922년에 유학을 마치고 [[경성부]]로 돌아왔다. 1924년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박헌영]]과 충남 예산에서 결혼식을 하였고 이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풀려났으며, 1926년에는 [[6.10 만세 운동]] 참가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27년엔 [[김활란]] 등이 참여한 여성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에 참가하는 등 여성 항일 운동 및 여성 계몽 활동에도 참여했다. 1927년 박헌영이 가출옥하는데 1928년 가을 남편 박헌영과 함께 [[만삭]]의 몸으로 조선땅을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했고, 도중에 딸 비비안나를 낳았다. [[파일:external/blog.joins.com/%E3%84%B1%EB%B0%95%ED%97%8C%EC%98%81=%EC%A3%BC%EC%84%B8%EC%A3%BD%EB%B6%80%EB%B6%80%201928%20%EC%9A%B8%EB%9D%BC%EB%94%94%EB%B3%B4%EC%8A%A4%ED%86%A1.jpg]] 1928년 남편 박헌영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090013.jpg]] 1928년 남편 [[박헌영]]과 딸 비비안나와 찍은 사진. 그 후 줄곧 [[모스크바]]에서 지내다가 [[코민테른]]의 지시로 1932년 상하이로 갔다. 1933년 박헌영이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 형무소에 갔고 김단야와 [[모스크바]]에 피신한다. 박헌영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다른 공산주의자인 [[김단야]]와 재혼하였다.[* 김단야도 아내 고명자와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다만 1929년부터 주세죽과 [[김단야]]가 [[불륜]] 관계였다거나, 김단야가 박헌영이 살아있는 걸 알면서도 숨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공산주의들 사이에서는 이 추문을 두고 주세죽과 김단야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 박헌영은 "신경쓸 거 없다"며 넘어갔다. 박헌영은 1939년에 출옥하였는데, 친척들이 주세죽의 행방을 묻자 죽었다고 답했다고. == 유배 이후의 삶 == 1937년 [[김단야]]의 아이를 [[임신]]하였으나, [[대숙청]]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김단야는 일본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주세죽도 체포되어 1938년에 [[카자흐스탄]]으로 유형을 가 5년간 복역하였다. 유형 생활 중 김단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비탈리는 1~2살 무렵 사망했다. [[카자흐스탄]] 지역 [[협동농장]]에서 계속 일하던 중에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스탈린]]에게 귀국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전 남편 박헌영은 북한 부수상이 되었고, 1946년 7월에 [[소련]]을 방문했을 때 딸 박비비안나를 만났으나 주세죽과는 만나지 않았으며, 1949년 8월에 자신의 비서였던 윤 레나와 재혼했다. 1953년,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 딸 비비안나가 있는 [[모스크바]]로 가던 중 기차에서 병이 악화되어 모스크바 도착 후에 사망하였다. 딸은 어머니가 모스크바에 온다는 것을 모르고 다른 지방으로 공연을 떠난 상태라 임종은 [[사위]]인 빅토르 마르코프가 지켰다. 급하게 무리해서 딸에게 온 이유는 전 남편 박헌영이 북한에서 구속(김일성의 정치숙청)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소련 정부가 박헌영의 핏줄이기도 한 딸 비비안나를 북한으로 강제송환한다거나 정치적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강이 안 좋은 몸을 이끌고 무리해가며 모스크바로 간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소련의 교통, 통신 상황이 열악해서 딸에게 미리 연락하지 못하고 갔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딸을 만나지 못했다. == 사후 == 1989년에 소련에서 정식으로 복권되었다. 김단야도 이때 복권되었다. 참여정부 시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재평가가 진행되면서[* 2005년 [[여운형]]에 대한 건국훈장 수여가 대표적이다.] 2007년 대한민국에서 복권되고 [[대한민국 훈장|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딸 비비안나 박이 한국에 와서 대리수령했다. 다만 [[일제강점기]]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건국훈장 수여에 대해서 보수우익 계열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www.donga.com/04-0490199%20.jpg]] 딸인 박 비비안나(1928-2013). 주세죽의 묘비 앞이다. 딸인 박 비비안나는 평생을 소련(러시아)에서 살며 무용가로 활동했다. 1928년에 부모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소련으로 탈출할 때 기차안에서 태어나 소련의 보육원[* 주로 고아를 키우는 일반적인 보육원이 아니라 소련의 지원 및 지령으로 활동하는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의 자녀를 위한 시설이다. 그런 특수성 때문에 보통 보육원보다 시설이나 대우가 훨씬 좋았다.]에서 성장해서 무용가가 되었고, 훗날 소련의 모이세예프 무용학교 교수가 되었다. 남편은 [[러시아인]] 화가인 빅토르 마르코프. 1991년에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박헌영의 고향인 [[충청남도]]의 흙을 갖고 [[러시아]]로 가 어머니의 묘비에 매장하였다. 2013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