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930 ~ 2006. 11. 19 == 개요 == [youtube(tHqh2fsL758)] [[대한민국]]의 [[군인]]. [[6.25 전쟁]] 당시 포병간부후보생 13기로 임관하여 육군 포병 소위로 참전,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납치되었고, 북한에서 국군 포로의 신분으로 43년간 강제 노역에 동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국내에서는 1951년에 전사자로 처리됨과 동시에 육군 중위로 추서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으로 귀환 후 정식 전역하였다. [[인간승리]]의 표본. == 일생 == 평안남도 평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연희대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대한민국 육군]]에 자원 입대, 갑종장교 포병간부후보생으로 육군 [[소위]] 임관하여 [[육군본부]] 직속 [[포병]] 101대대 관측담당으로 참전하였다가,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군]]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북한으로 끌려갔다. 이후 [[조선인민군 육군]]의 국군 포로들이 강제 편입되어 편성된 의용군에 배속되었으나, [[1952년]] 동료 포로들과 탈출을 계획하다가 정치부에 발각되어 월남기도와 반동분자의 혐의로 13년간 [[서흥군]], [[덕천시]], [[함흥시]], [[아오지 탄광]], [[강계시]] 광산 등지의 강제 노역소에 복역하였다. 13년 동안의 강제 노역소 생활을 마친 후에는 [[자강도]]에 광부로 배치되어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오랜 광산에서의 노역으로 인해 지병인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68630&cid=40942&categoryId=32799|규폐증]]을 얻게 된다. 하루 10시간여의 중노동에 동원되었으나 일일 식량 배급량은 고작 300g[* 참고로 일반적인 성인 기준으로 1인당 하루 최소 권장량은 600g이다.]정도였다. 이후 규폐 증세가 심해져서 산간 마을로 보내지게 되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중국]] 상인을 통해서 귀환을 결심하게 되고, 목선을 타고 중국을 통해 북한을 탈출하여 해상을 표류하다 [[1994년]] [[10월 23일]] 새벽 [[대한민국]]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되었고, 병원에 입원하여 가족 상봉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왜 '대한민국' 수산청의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될 수 있었을까? 한겨레21 1994년 11월 10일자 기사 <국민들의 시선을 돌려라>에 그 전말이 나와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애당초 정부([[안기부]])는 조창호씨의 귀환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씨는 10월 20일 대한민국 영해상까지 밀항했으나 돌아가야 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사고]](21일)를 고비로 정부(안기부)는 마음을 180도로 돌려 먹었고 22일 조씨 가족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조씨가 두번째로 표류하고 있던 해상에 어업지도선이 '우연히' 나타날 수 있었고 조씨는 무사히 남한에 안착했다. 즉 [[성수대교 붕괴사고]]라는 초대형 사고를 더 큰 뉴스로 덮기 위해 원래 구해줄 생각도 없던 사람을 필요에 의해 구해줬을 뿐이다. 그 증거로 김영삼 정부는 북에 남은 조창호 자녀(3남매)의 안전을 위해 언론 공개를 하지 않거나, 적어도 자녀들이 피할 수 있도록 발표를 미뤄달라는 통사정마저 뿌리치고 귀환 발표를 강행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10월 25일자 기자수첩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1994&M=10&D=25&ID=9410250207|<이례적 신속발표>]]에선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창호 씨 북한 탈출/귀환 발표는 전례 없이 신속하고 친절해 언론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했고, 동아일보도 다음날 기자의 눈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0260020910201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10-26&officeId=00020&pageNo=2&printNo=22666&publishType=00010|<안기부의 구태(舊態)>]]에선 안기부의 이와 같은 행태를 '3류 소설'이라 평했다. 곧이어 그는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지고,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입원한 병실을 찾아온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 [[이병태(군인)|이병태]]에게 귀환을 보고하였으며, [[10월 27일]]에는 육군 장교의 [[정복(의복)|정복]]을 지급받아 착용하고 [[육군참모총장]]에게 귀환을 보고하였다. [[11월 25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현충탑 지하 영현 봉안실의 대리석 위패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을 손수 지웠다. 왜냐하면 1951년에 육군 중위로 추서됨과 동시에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823726|전사자]]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군인 정신에 귀감이 된 점을 평가받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02310&cid=40942&categoryId=31799|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다. [[11월 26일]]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짐으로써 43년 3개월이라는 최장기록의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는 [[6.25 전쟁]] 당시에 포로로 잡힌 많은 국군포로들이 여전히 북한에 생존하고 있음을 증언하였고, 이는 북한에 생존해 있을 많은 국군포로들과 강제 [[납북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이 처한 참혹한 인권환경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말년에 그는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북한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생활상을 증언하고 그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2006년]] [[11월 19일]], 북한에서의 오랜 노역으로 인한 지병이 악화되어서 76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영면했으며, [[11월 21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263095|#1]],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214&aid=0000024317|#2]] == 여담 == 그는 전역식에서 길고 참담했던 북한 억류생활을 이겨낸 힘은 신앙심과 전쟁터에서 배운 군인 수칙이었다고 회고하였다. [[6.25 전쟁]] 당시 국군포로 가운데 320여 명이 회유와 협박에 굴복해 전향한 사실에 비춰볼 때 그가 40여 년 만에 탈출해서 돌아온 것은 군인정신의 귀감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창호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게 당시 군복무 중이던 연예인들을 총동원해서 만든 [[알바트로스(영화)|알바트로스]]... 그러나 작품은 [[괴작]]으로 묻혀졌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으로. [[분류:6.25 전쟁/군인]][[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1930년 출생]][[분류:200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