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87년 출생]] [[분류:1968년 사망]] [[분류:잉글랜드의 축구선수]] [[분류:사우스햄튼 FC/은퇴, 이적]] [[분류:원클럽맨]] [[분류:잉글랜드의 축구감독]] [[분류:르아브르 AC/역대 감독]] [[분류: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역대 감독]] [[분류: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분류: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감독]] ||<tablewidth=100%><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c5a77c><tablebgcolor=#ffffff,#191919>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D439B 0%, #1A2842 20%, #1A2842 80%, #1D439B)" {{{#ffffff '''조지 킴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파일:George Kimpton.jpg]] || 이름 || 가브리엘 시블리 "시드 "킴튼[br](Gabriel Sibley "Sid" Kimpton) || || 생년월일 || [[1887년]] [[8월 12일]] || || 사망년월일 || [[1968년]] [[2월 15일]] || || 국적 || [[파일:잉글랜드 국기.png|width=28]] [[잉글랜드]] || || 출신지 || 리브스덴 || || 포지션 || 공격수 || || 신체조건 || 178cm || || 등번호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 '''[[사우스햄튼 FC]] (1910-1920)''' || || 감독 || DFC 프라하 (1921)[br]폴로니아 바르샤바 (1921-1922)[br]KS 크라코비아 (1923)[br][[르아브르 AC]] (?-1926)[br][[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대표팀]] (1934)[br]프랑스 대표팀 (1935-1936)[br][[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RC 파리]] (1935-1939)[br]FC 루앙 (1939-1940)[br]FC 루앙 (1945)[br]르아브르 (1945-1946)[br]AS 쉘부르 (1946-1950) || [목차]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 === 선수 생활 === ==== 클럽 ==== 킴튼은 왓퍼드 근교의 리브스덴(Leavesden)[* [[영국 영화]]의 성지인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가 이 곳에 있다. 이 곳에서 [[007 시리즈]], [[해리 포터 실사영화 시리즈|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대표적인 영국 영화들이 촬영되었다.]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왓포드 FC]]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떨어졌고 1910년 9월부터 당시 남부 리그 소속이었던 [[사우스햄튼 FC]]에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시즌에는 센터 포워드로 22경기에 출전, 7골을 기록하여 사우스햄튼의 강등권 탈출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그의 득점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사우스햄튼의 새 감독은 다음 시즌의 그를 라이트 하프백, 아웃사이드 라이트 등 여러 포지션으로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스햄튼의 성적은 작년과 비슷하게 강등권 바로 윗자락이었다. 1912-13 시즌엔 더욱 팀의 상황이 좋지 않아 10월이 넘어가도록 단 1승밖에 올리지 못했고 킴튼의 자리도 위태로워졌다. 2월 무렵부턴 그의 자리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킴튼은 새 시즌 11월이 되어서야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 다시 출전을 시작했고 다음 해 10월에 다시 센터 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그리고 킴튼은 그 시즌에 10골을 넣어 사우스햄튼의 6위에 보탬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킴튼은 소니크로프트(Thornycroft)라는 조선 회사에서 일했고 1919년에 다시 축구 리그가 시작되었을 때 킴튼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 때까지 사우스햄튼에 남아 있던 단 세 명의 선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킴튼은 해당 시즌에 단 두 차례의 출전에 그쳤고 킴튼은 이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다. 킴튼은 사우스햄튼에서 149경기, 30골의 기록을 남겼다. === 감독 === 킴튼은 여러 팀에서 감독을 맡았다.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킴튼은 [[잉글랜드|물 건너]] [[아스날 FC]]의 W-M 포지션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에 접목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선수들은 더 잘 할 수 있다. 그들은 축구의 규율을 따라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토리노]]에서 열린 프랑스의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라운드#s-1.3|첫 경기]]. 상대는 유럽 대륙 최강이라 평가받던 분더팀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였다. 킴튼은 [[조르주 베리에스트|베리에스트]]를 불러 오스트리아의 핵심 선수 [[마티아스 신델라|신델라]]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라는 지시를 내렸다. 프랑스 선수들은 열심히 싸웠지만 오스트리아에 아깝게 패했다. 그리고 프랑스 축구팬들은 그 결과에 호의를 보였다. 프랑스 대표팀이 [[파리(프랑스)|파리]]의 [[파리 리옹역|리옹역]]에 도착했을 때 4천여명의 환대를 받았다. 킴튼은 1935년부터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RC 프랑스]]의 감독을 맡았고 프랑스 대표팀에서도 일을 겸임했다. 1935년 3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에 프랑스가 1대3으로 패하면서 프랑스 대표팀에서의 그의 입지는 좁아져갔고 기어어 1936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에 1대6,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체코슬로바키아]]에 0대3으로 패하자 [[프랑스 축구 연맹]]은 킴튼에게 더 이상 일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RC 프랑스에서 킴튼은 당시 팀의 서포터들이 선호하던 경제적인 축구를 비판했다. 하지만 RC 프랑스에서 킴튼은 1935-36 시즌의 [[더블#s-7|더블]]과 1938-39 시즌의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이끌어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 냈다. 킴튼은 RC 프랑스에 쿠프 드 프랑스 우승컵을 선물하고 FC 루앙으로 떠났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축구 리그는 중단되었다. 킴튼은 나치에 체포된 적도 있었지만 무사히 돌아왔고 FC 루앙에서 1945년까지 있다가 [[르아브르 AC]]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킴튼은 르아브르에서 시원찮은 성적을 올리다 경질당했고 AS 쉘부르에서 그의 감독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그의 가장 큰 가치는 신뢰도와 다재다능함이었다. 위대한 플레이어로 평가받을 레벨은 아니었지만 용기와 분주함으로 인기를 얻었다. == 수상 == === 감독 === * [[리그 1|디비지옹 1]] 우승 1회: 1935-36([[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 * [[쿠프 드 프랑스]] 우승 2회: 1935-36, 1938-39(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