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회원수정)] [include(틀:대한민국의 주요선거)] ||<-3><tablewidth=500><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5ba6><tablebgcolor=#ffffff,#191919><bgcolor=#005ba6> {{{+1 {{{#ffffff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대대선.jpg|width=100%]][br]{{{-2 후보자들의 선거 포스터}}}}}} || ||<-3><bgcolor=#005ba6> {{{#!wiki style="margin: -7px -12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5ba6><width=30%><bgcolor=#ffffff,#191919> {{{-2 [[1967년]] [[5월 3일]]}}}[br][[제6대 대통령 선거|6대 대선]] ||<width=5%> → ||<bgcolor=#ffffff,#191919><width=30%> {{{-2 [[1971년]] [[4월 27일]]}}}[br]'''7대 대선''' ||<width=5%> → ||<bgcolor=#ffffff,#191919><width=30%> {{{-2 [[1972년]] [[12월 23일]]}}}[br][[제8대 대통령 선거|8대 대선]] ||}}} || ||<width=20%><bgcolor=#f0f0f0,#191919> {{{#005ba6 '''투표율'''}}} ||<-2>79.9%{{{-3 [[제6대 대통령 선거|{{{#blue,#0000ff ▼ 3.7%p}}}]]}}} || ||<-3><bgcolor=#005ba6> {{{#ffffff '''선거 결과'''}}} || ||<bgcolor=#f0f0f0,#191919> {{{#005ba6 '''후보'''}}} ||<width=40%> [[민주공화당|{{{#!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835B38; font-size: .8em;" {{{#ffffff '''민주공화당'''}}}}}}]][br]'''[[박정희]]''' ||<width=40%> [[신민당(1967년)|{{{#!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0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DC352A; font-size: .8em;" {{{#ffffff '''신민당'''}}}}}}]][br]'''[[김대중]]''' || ||<|2><bgcolor=#f0f0f0,#191919> {{{#005ba6 '''득표율'''}}}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35B38 54%, #DC352A 54%);" }}} || || '''53.2%''' || 45.3% || ||<bgcolor=#f0f0f0,#191919> {{{#005ba6 '''득표수'''}}} || '''6,342,828''' || 5,395,900 || ||<-3><bgcolor=#005ba6> {{{#ffffff '''당선인'''}}}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박정희_대통령.jpg|width=100%]]}}} || ||<-3><bgcolor=#835B38> [[민주공화당|{{{#ffffff '''민주공화당'''}}}]][br]'''[[박정희|{{{#ffffff {{{+2 박정희}}}}}}]]''' || [목차] [clearfix] == 개요 == ||<tablewidth=600><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5ba6><tablebgcolor=#005ba6><tablecolor=#fff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대박정희.jpg|width=100%]]}}} || || '''취임 선서를 하는 [[박정희|{{{#ffffff 박정희}}}]] 대통령'''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1박정희당선_경향신문.png|width=100%]]}}} || || '''당선 확정을 알리는 기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iE2cFRZmEe4)]}}} || || '''대통령 취임 영상''' || >"''' [[10월 유신|여러분들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 주십시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하는 이야기도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여러분들이 표를 많이 모아서 우리 공화당과 이 사람을 한 번 더 지지하여 일할 수 있는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 >[[민주공화당]] 후보, '''대통령 [[박정희]]''', 서울 후보선거유세, 1971년 4월 25일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제8대 대통령 선거|앞으]][[제9대 대통령 선거|로는]] [[간접 선거|선거도]] [[통일주체국민회의|없는]] [[10월 유신|영구집권의 총통제]]를 한다는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 국회의원 [[김대중]],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 1971년 4월 27일 [[1971년]] 4월 27일에 있었던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로, 이 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군부 독재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직선제]]였다.[*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16년간 대통령 직접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 배경 == === [[민주공화당]], [[3선 개헌]] === [[5.16 군사정변]] 이후에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중임을 1차에 한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는 이미 연임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필 이 때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국회 내 의석 수가 전체의 '''2/3'''을 훌쩍 넘는 바람에(...)[* 하필이라기 보다는 박정희와 중앙정보부([[김형욱]])의 공작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 정설이다. [[7대 총선]] 과정에서 물품 살포, 돈봉투 살포, 공안사건 조작등의 수단을 통해서 어거지로 개헌선 확보에 주력시켰다. 물론 당연히 선거가 끝난 후에 난리가 나서 재보선이 대규모로 치러질 판이었지만 사법부에 압력을 넣어서 무마시켰던 것.] 여당이 마음만 먹으면 [[헌법]] 개정을 통한 재출마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주공화당]] 안에서도 엄청난 진통이 있었다. 다름아닌 민주공화당의 2인자였던 '''[[김종필]]의 반발'''이었다. [[5.16 군사정변]]의 브레인이자, 초대 [[중앙정보부]] 부장, [[한일기본조약]] 협상을 주도했던 그는 당연히 박정희가 출마할 수 없던 민주공화당의 차기 대선주자로 떠올랐고, '''[[박정희]]의 3선을 반대하였다.''' 마침 비슷한 시기 [[신민당(1967년)|신민당]]에서 제출한 [[권오병]] 문교부장관 해임권고 결의안이 상정되었는데, 예춘호 등 김종필계 민주공화당 의원들이 세력과시를 위해 찬성표를 던지면서 결의안이 가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분노한 박정희와 공화당 내 개헌파 의원들이 김종필계 의원들을 공화당에서 제명 처분시켰다. 김종필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부산에 내려갔다가, 박정희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 무력하게 3선개헌 작업에 앞장선다. 이렇게 추진된 3선 개헌(6차 개헌)은 [[신민당(1967년)|신민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본회의 상정이 되지 않다가, 새벽 2시 반에 공화당 의원들끼리 국회 별관에 모여서 날치기 통과시키며 국회를 통과했고, 이후 [[1969년 국민투표|국민투표를 거쳐 개정이 확정]]된다. === [[신민당(1967년)|신민당]]의 40대 기수론 === 한편 이전까지 무력한 [[야당]]에 불과했던 '''[[신민당(1967년)|신민당]]'''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1969년]] [[11월 8일]] 당시 '''42세'''의[* 하지만 이미 '''4선''' 의원에 신민당 '''원내총무'''로 당직까지 맡고 있었다. 1954년 '''26세'''에 거제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이다. 그 와중에 총선에서 1번 낙선한 적이 있는 경력만 따지자면 거물급 중진 의원이었다.] '''[[김영삼]]'''이 남산 외교구락부 건물[* 2008년 철거되었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뒤이어 1970년 1월 24일 '''45세'''의 '''3선'''의원 '''[[김대중]]'''이, 2월 12일 '''48세'''의 '''3선'''의원인 '''[[이철승]]'''이 각각 출마를 선언했다. 신민당 지도부에서는 "젖비린내 나는 정치 소년들이 나온다"며 반감을 표했지만[* 지금의 관점으로 봐선 당연한 일인 자유 경선이었으나, 당시의 당 지도부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얼마나 지금과 다른 시대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범진산계의 양일동 부당수는 전당대회 3주 전인 70년 9월 초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09050032920102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0-09-05&officeId=00032&pageNo=1&printNo=7668&publishType=00020|인터뷰]]에서 "40대 후보들에게 지명대회를 맡길 수는 없다, 또 그들에 의해 지명 대회가 이끌려서도 안 된다, 당의 꼴이 엉망이 된다"며 지난 67년 대선처럼 윤보선·이범석·백낙준·유진오 등의 4자 회담을 통해 후보를 결정하거나 당 간부들로 이뤄진 후보조정위원회를 만들어서 후보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주요 정당의 지도자가 있다면 소가 웃을 얘기겠으나, 이것이 그때 당시 당 지도부의 분위기였다. 유진오 전 총재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091800099201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0-09-18&officeId=00009&pageNo=1&printNo=1392&publishType=00020|9월 17일]] 대통령 후보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했다는 말이 "경선은 할 생각이 없지만 추대를 해준다면 나서겠다"는 것이었던 것만 보더라도, 그 당시 당 대표며 야권 리더며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감히 자기 같이 대단한 사람에게 제발 받아달라며 후보직을 바치진 못할 망정 후보를 하려면 열심히 선거를 치르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당내의 반응은 이들 '''40대 기수들'''에게 환호하고 있었다. 후보들에게 "당이 단합하는 모습을 보이려면 명망 있는 분을 단독 추대하는 게 그림이 좋다~~어디서 네깟 것들이 나서!~~"면서 출마 철회를 종용하던 당 지도부도 결국은 포기, [[1970년]] 9월, [[신민당(1967년)|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 투표에서 이철승의 지지를 업은 [[김대중]]이 458, [[김영삼]] 410으로 [[김대중]]이 신민당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된다. 그리고 [[김영삼]]은 결과에 승복하고 대선 동안 [[김대중]]의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밤에는 분해서 울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양김의 애증 관계는 본격적으로 시작~~ 훗날 김영삼은 "2차 투표 때 소석과 DJ가 '(둘 다 호남 사람인) 우리가 남이냐'며 연합했다," "이후 나는 '배알도 없느냐'며 울먹이는 우리 측 사람들 달래며 DJ를 지원했는데 DJ는 내게 선대위원장을 시켜주진 못할 망정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완전히 나를 배제시켰다"고 술회했다. [[https://news.joins.com/article/3790444|인터뷰]] ||<tablewidth=500>[[파일:attachment/Kim_n_Kim.jpg|width=100%]]|| || 김대중에게 경선 패배를 인정하며 지원을 약속하는 김영삼 || 이 세 명의 '''40대 기수'''들은 이후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을 거쳐 [[야당]]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김영삼]], [[김대중]]의 양김은 끝내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에 오르기도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양김]] 문서 참조. == 과정 == [include(틀: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 [[파일:attachment/7th_election.jpg]] ||<tablebordercolor=#eeeeee><tablealign=center> [youtube(FL8Z3yODYQo)] || ||<bgcolor=#eeeeee,#191919> MBC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br]김대중 박정희 대선유세 || === 정책공약 === [[1971년]] 5월에 [[선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는 [[1970년]] 10월부터 지방유세를 돌기 시작하는 등 일찍부터 대선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김대중 후보가 제시한 공약 중에는 당시로서는 정말 파격이라고 할 수 있는 공약들이 많았다. * '''[[예비군/대한민국|향토예비군]] 폐지'''[* 현재와는 달리 창설 당시의 향토예비군은 독재정권 관제사업에 강제노역을 동원하기 위한 임의 소집으로 물의를 많이 빚어서 향토 예비군제도에 대한 반감이 굉장히 컸었다.] * 미/일/중/소 4개국에 의한 전쟁억제 보장 요구 * '''노사공동위원회 설치''' * 남북한 사이의 단계적 비정치적 접촉 시도 * 대중경제론: 박정희정부의 [[수출주도산업화]]에 [[수입대체산업화]]로 회귀를 주장 반면 [[민주공화당]]은 대통령후보 지명을 [[1971년]] '''3월'''에 하는 등 선거 열기가 처음부터 뜨거워지는 것을 가급적 막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박정희]] 후보는 안보 문제와 예비군 폐지 문제, 경제정책 문제 등으로 [[김대중]] 후보와 열띤 공방을 벌였다. === 부정선거 논란 ===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표 확보를 위해 정부가 뿌린 돈이 당시 '''국가예산의 1/7'''인 700억원 남짓이었다.[* [[김종필]]은 600억을, 71년 당시 [[중앙정보부]] 보안차장보 [[강창성]]씨는 700억을 증언했다. 또한 미 하원 소위 보고서는 미국계 정유사들(걸프, 칼텍스, 유니언 오일)이 제공한 돈이 정치 자금으로 쓰인 경황을 보고했다.] 2010년대 기준으로도 선거자금으로 큰 돈이지만 당시의 물가수준으로 친다면 최소 100배는 더해야 될 판으로, 서울의 아파트 30평 아파트 한 채가 4백만 원 가량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다. 더욱이 부재자 투표의 표가 [[박정희]] 몰표로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다만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만큼 부재자가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곧 묻혀버렸다.] 더불어 [[김대중]] 자서전에서는 유리한 지역의 표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전부 무효표 처리된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결국 [[3.15 부정선거]]만큼은 아니라도 매우 불공정한 부정선거였다는 것은 확실했고 이 때문에 대학생 데모 등 반대집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위수령]]이 남발되면서 모두 진압되었다. 이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미국 의회]]의 일명 '[[프레이저 보고서|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부정선거가 아니었다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을 것이며 그 엄청난 부정선거 공작에도 큰 표차가 없는 결과를 낸 김대중 후보를 상당히 두려워했다는 증언을 했다. 이 증언 이후 [[김형욱]]은 파리에 갔다가 실종되어버린다. == 결과 == ||<-7><tablebordercolor=#4169e1><bgcolor=#4169e1> '''{{{#ffffff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 ||<rowbgcolor=#0c0f8d> '''{{{#ffffff 기호}}}'''[* 이전 선거까지 추첨으로 기호를 배분했던 것과 달리, 이 때부터는 기호를 '''국회 의석 보유수''' 순서대로 부여했고, 광복 직후 문맹률이 높아서 쓰였던 막대 기호(|, ||, |||, |||| 등) 대신 아라비아 숫자 기호도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 '''{{{#ffffff 후보명}}}''' || '''{{{#ffffff 정당}}}''' || '''{{{#ffffff 득표수}}}''' || '''{{{#ffffff 득표율}}}''' || '''{{{#ffffff 순위}}}''' || '''{{{#ffffff 당선여부}}}''' || || '''1''' || '''[[박정희]]''' || [include(틀:민주공화당)] || '''6,342,828''' || '''53.19%''' || '''1''' || '''당선''' || || 2 || '''[[김대중]]''' || [include(틀:신민당(1967년))] || 5,395,900 || 45.25% || 2 ||<|2> 낙선 || || 3 || [[박기출]] || [include(틀:국민당(1971년))] || 43,753 || 0.36% || 4 || || 4 || [[성보경]] || [include(틀:민중당(1967년))] || - || - || - || 유세기간 중 자격 반납 || || 5 || [[이종윤]] || [include(틀:자민당)] || 17,823 || 0.14% || 5 ||<|2> 낙선 || || 6 || [[진복기]] || [include(틀:정의당(1967년))] || 122,914 || 1.03% || 3 || || 7 || [[김철(1926)|김철]] || [include(틀:통일사회당)] || - || - || - || 유세기간 중 자격 반납 || ||<-3> 선거인수 || 15,552,236 ||<-2> 투표수 || 12,417,824 || ||<-3> 무효표수 || 494,606 ||<-2> 투표율 || 79.85% || 투표 결과 겨우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 비록 표 차이 자체는 생각보다 작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지역감정을 있는 대로 자극하면서 부정선거까지 펼쳐서 나온 결과였다는 점이다. 신선한 정책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은 [[김대중]] 후보는 이후 야권 거물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며 박정희의 강력한 정적이 된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는 이전 대선들에 비해서 유달리 군소후보들의 총 득표율이 1.5%정도로 낮다. 그만큼 [[박정희]], [[김대중]] 양대 후보가 주목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얻은 득표율인 45.2%는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깰 때까지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얻은 최대 득표율이었다. 무려 31년이나 깨지지 못한 기록인 셈. === 지역별 결과 === [[파일:800px-7대_대선.jpg]] ||<-3><tablebordercolor=#4169e1><bgcolor=#4169e1> '''{{{#ffffff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 || 지역 ||<bgcolor=#835B38> '''[[민주공화당|{{{#ffffff 민주공화당}}}]][br][[박정희|{{{#ffffff 박정희}}}]]''' ||<bgcolor=#DC352A> '''[[신민당(1967년)|{{{#ffffff 신민당}}}]][br][[김대중|{{{#ffffff 김대중}}}]]''' || || 전국 ||<bgcolor=#d2811a> '''6,342,828[br](53.2%)''' || 5,395,900[br](45.2%) || || 서울 || 805,772[br](40.0%) ||<bgcolor=#c24b47> '''1,198,018[br](59.4%)''' || || 부산 ||<bgcolor=#d2811a> '''385,999[br](55.7%)''' || 302,452[br](43.6%) || || 경기 || 687,985[br](48.9%) ||<bgcolor=#c24b47> '''696,582[br](49.5%)''' || || 강원 ||<bgcolor=#d2811a> '''502,722[br](59.8%)''' || 325,556[br](38.8%) || || 충남 ||<bgcolor=#d2811a> '''556,632[br](53.5%)''' || 461,978[br](44.4%) || || 충북 ||<bgcolor=#d2811a> '''312,744[br](57.3%)''' || 222,106[br](40.7%) || || 경남 ||<bgcolor=#d2811a> '''891,119[br](73.4%)''' || 310,595[br](25.6%) || || 경북 ||<bgcolor=#d2811a> '''1,333,051[br](75.6%)''' || 411,116[br](23.3%) || || 전남 || 479,737[br](34.4%) ||<bgcolor=#c24b47> '''874,974[br](62.8%)''' || || 전북 || 308,850[br](35.5%) ||<bgcolor=#c24b47> '''535,519[br](61.5%)''' || || 제주 ||<bgcolor=#d2811a> '''78,217[br](56.9%)''' || 57,004[br](41.4%) || [[6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전라도]], [[제주도]]에서는 [[박정희]]가 이전 대선보다 낮은 지지율을 받았으며 여기에 [[서울]]까지 추가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여전히 박정희는 10% 이상의 차로 이겼다. 그 외의 지역에서는 이전 대선보다 높은 지지율을 받았다. 그리하여 [[경기도]]에서는 사실상 백중세를 이루었으며, [[충남]]도 이제 박정희 쪽으로 돌아섰다. 5, 6대 대선과 다른 점으로는 영, 호남에서의 득표율 양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전 대선까지 박정희는 [[경남]]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이번에는 [[경북]]에서 더 지지를 받았다. 또한 6대 대선까지 [[전북]]과 [[전남]] 중에서 전북이 박정희를 더 싫어했으나 이번에는 전남에서 박정희 비토 정서가 훨씬 높아졌다. == 영향 == === [[지역감정]] 문제 대두 === 당시 [[신민당(1967년)|신민당]]은 1960년대 중순부터 호남 푸대접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급기야 19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 유세 당시에는 김대중을 포함한 신민당 의원들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910130032920102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9-10-13&officeId=00032&pageNo=1&printNo=7391&publishType=00020|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이전 [[5대 대선]]때에도 윤보선 당의 한 소속 의원이 '''부산,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다.'''라는 발언을 해서 박정희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이 있다. 이렇듯 지역주의를 선동하는 식의 선거 전략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사용한 것이었다. '''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는 말은 지금 해도 충분히 논란의 여지가 있을 주장이다.] 이렇듯 안 그래도 호남에서 형성 중이던 반여 정서는 호남 출신 김대중이 신민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자 더욱 심화되었다.[* 김대중이 지역감정을 자극한 또 다른 사례로는 [[13대 대선]] 때 들고 온 [[4자필승론]]. 이건 빼도박도 못하는 김대중의 실책이다. 실제로 13대 대선 이전에 대구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둘 정도로 지역색이 심하지 않았다.] 박정희 측 또한 이런 자극성 유세몰이에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이 이전부터 [[이효상]] 등이 주장해왔던 '''신라 대통령론'''과 [[이후락]]의 [[중앙정보부]]에서 주도하여[* 이 전략에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humorbest&no=644868|엄창록이 가담했다는 주장도 있다.]] ] 선거 3일전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허위전단을 뿌려 선동하여 영남(특히 농촌지역)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 내었고, 이는 호남의 [[김대중]] 지지율에 비해 영남의 박정희 지지율이 더 압도적으로 높은 선거결과로 나타났다. 이로써 1967년 대선에서 처음 나타났던 영호남의 지역주의는 이번 선거에서 훨씬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런 지역주의에도 김대중은 [[부산광역시]]에서 40% 후반으로 선전했고, [[경남]]에서도 [[충무시]], [[창원시]], [[마산시]] 등 당시 인구가 급증하던 지역에서 30% 후반을 득표하는 등 선전했다. 또한 경상북도에서도 당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대구시]]에서 30% 초반 정도 득표했다.[* 예외는 [[거창군]]인데 여기서도 30% 정도를 득표했다.] [[전남]], [[전북]]에서도 박정희가 34~35% 정도 득표 했으며, 또한 7대 대선 직후 치러진 [[8대 총선]]의 경, 호남(여21 : 야13)이 오히려 영남(여26 : 야24)보다 여당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지역감정으로 인한 몰표성이 그나마 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막을 드러낸 지역주의는 [[중선거구제]]를 내세운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주춤했다가, [[1987년]]의 [[13대 대선]]과 뒤이은 [[13대 총선]]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 [[10월 유신|유신의 원인이 되다]] === > “이것 봐. 내가 그래도 그동안 잠자고 있던 국민이 일어서서 일하게 하는 세상을 만들고 나라를 위해 열심히 기여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김대중씨가 뭐를 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안 나?''' 내가 이름이 나도 김대중보다 더 낫고, 선거비용을 써도 김대중보다 훨씬 더 많이 썼는데 말이야. 행정력은 또 얼마나 사용했나. 선거라는 게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긴 하지만 이게 큰일 날 수도 있어.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선거를 하다 보면 앞날을 제대로 내다보고 건전하게 나라를 열어 갈 위인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뽑힐 수 있어. 그럴 땐 조국 근대화라는 혁명 과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어. '''[[10월 유신|그러니 내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선거 다음 날 박정희의 발언) > ---- > [[https://news.joins.com/article/18123011|[김종필 증언록] “김대중 뭘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 낙심한 박정희의 화살, 과녁 벗어나 “큰일 나겠어” … 유신을 작심했다]] [[갑툭튀|갑자기 등장한]] 40대 후보에게 예상외로 접전 끝에 이기며 [[박정희]]는 체면을 구긴다. 여기에 더해 대선 한 달 뒤 치뤄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진산 파동]]이 터지며 야당인 [[신민당(1967년)|신민당]]에게 선거 판세가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예상을 깨고 신민당이 89석을 확보하여 개헌저지선(69석)을 훌쩍 넘는 의석수를 획득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결국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연임이 불가능해 보이자 불안해진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일으킨다. 선거 운동 중 박정희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물론 겉으로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김대중]]은 "박정희가 이번에도 집권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입니다." 라고 했는데 박정희의 발언과 김대중의 우려는 '''[[제8대 대통령 선거|둘 다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 로고송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032700209203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03-27&officeId=00020&pageNo=3&printNo=15221&publishType=00020|기사]] 신민당은 동요 "산토끼"와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을 다음과 같이 개사해 선거에 사용했다. >-대중(大衆/大中)의 노래 (산토끼)- >대중아 대중아 어디로 가느냐 >대중 대중 김대중 찍고서 올 테야 >-미남 대통령 후보 (대머리 총각)- >신민당 강연장에 김대중 후보~ 오늘도 만나려나 기다려지네~ >미남인 그 얼굴에 연설도 잘해~ 행여나 나를 보나 발돋움했지~ >신민당 강연장에 김대중 후보~ 이번에 2번 찍어 승리하겠네~ >이번에 2번 찍어 승리하겠네~ [[분류:제3공화국]][[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