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인/목록]], [[가톨릭/인물]], [[암드립]] [include(틀:막사이사이상 수상자)]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070123135258197456652.jpg|width=150]] [[1944년]] [[3월 1일]] ~ [[1999년]] [[2월 9일]](향년 54세) [목차] == 소개 == 諸廷坵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칠원 제씨]](漆原). [[종교]]는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친동생도 가톨릭 쪽에서 일을 하는데, 친동생 제정원은 현직 [[신부(종교)|신부]]다. 제정원 신부는 2020년 현재 [[천주교 인천교구]] 만수1동성당 주임신부로 사목 중이다. 또한 부인 신명자 여사도 [[베로니카#s-1|베로니카]]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이다.]. == 생애 == 1944년 3월 1일, [[경상남도]] [[고성군(경상남도)|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척곡마을[* [[칠원 제씨]] 집성촌이다.][[http://m.pressian.com/m/m_article/?no=152547#08gq|#]]에서 제병근(諸炳根)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흥초등학교, 고성중학교, [[진주고등학교]]를 거쳐, 4수 끝에 1966년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이듬해 제적되었고, 1973년에 복학했다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되었다.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를 처분 받아 출소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야 대학을 졸업하고 1984년에 비로소 사면, 복권되었다. 1972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야학교사로 소외계층을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빈민운동에 투신하였다. 도시 빈민의 벗, 철거민의 대부로 불릴 만큼 도시 철거민들의 정착 문제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빈민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86년에 일생의 동지인 [[정일우(신부)|정일우]] 신부와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막사이사이상 수상 직후에도 왕십리 철거민들 앞에서 이른바 '[[전두환]] 개xx'로 알려진 연설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진술서에 '전두환 개xx'는 빼자는 경찰과 실랑이를 하다가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진 인사이기도 해서 결국 훈방 조치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말기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서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였다.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재야 세력이 평민당으로 입당하자 원칙 없는 야합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 양김 세력에 속하지 않는 재야 인사들의 정계 진입을 돕기 위해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노태우 정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91년)|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시흥시]]-[[군포시]] 지역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9년에 시흥군이 폐지되면서 군포읍이 군포시로 승격, 다만 이때 한정으로 시흥시와 하나의 선거구로 묶였다. 단일 선거구의 신설은 안산동이 안산에 편입되고 난 1996년의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철거민 반대 투쟁을 이끈 운동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회에서는 '''건설위원회'''에 소속되었는데, 의원 생활 2년만에 국회의원 중에서 최고의 전문성을 가졌다는 [[http://m.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102|평]]을 듣기에 이른다. 빈민 운동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쌓은 지식도 있고, 정치에 임하는 자세가 워낙 성실하다보니 가능했던 듯. 1995년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고 나서 야권이 분열하여 민주당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떨어져 나갔으나 제정구는 양김 세력을 비판하며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았다.[* 앞선 1994년에 [[김영삼]]으로부터 [[민주자유당]] 입당 제의를 받았으나 이 역시 비판하며 거절한 바 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재선된 뒤 [[통합민주당(1995년)|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냈으며,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결성하여 사무총장을 맡았다. 1997년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할 때 정권 교체를 주장하던 통추 주류와 결별하고 삼김청산을 주창하며 [[한나라당]]에 합류하였다.[* 이를 두고 삼김정치 청산을 목적으로 독재정권의 후신과 야합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보수 정당 합류 뒤에도 소장파 의원들을 규합하여 정치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동북아평화센터 설립에도 참여하는 등, 정파색에 휩쓸리지 않는 의정 활동을 보였다. 1998년,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 서면 질의서를 제출하는 등 선량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다가 이듬해인 1999년, 55세의 나이로 [[선종(가톨릭)|선종]]하였다. 선종 직후에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여담]]으로 제정구의 영결식 때 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였던 [[이부영]]이 '''"제정구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 때문에 억장이 터져 DJ암으로 죽었다."'''라는 공격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물론 이부영은 4년 뒤에 [[김영춘(정치인)|김영춘]], [[이우재(1936)|이우재]], [[안영근]], [[김부겸]] 등과 [[열린우리당]]을 만드는데 참여한다. 이는 아이러니라고 할 수 없는 게 원래 김대중이 대선 패배로 정계은퇴 후 다시 정계 복귀하면서 국민회의를 창당, 통합 민주당을 뇌사상태로 빠뜨린 원인 제공을 했고, 그 결과가 통합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DJ가 당선을 위해 국민회의를 상당히 우향우 하면서 신한국당과의 이념차이 역시 옅어져, 재야와 민주당계 정당에서 DJ와 [[동교동계]]에 비판적인 시각이 상당했다. 실제로 꼬마 민주당에 남았던 [[노무현]]도 마찬가지로 대통령 시절에도 동교동계와 갈등을 빚었다. 제정구 의원이 훗날까지 살아 있었다면 향후 행보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그의 지역구였던 [[시흥시]]는 보좌관 출신이었던 [[조정식]], [[백원우]] 등의 지역구가 되기도 했다. 여담으로, 복음자리는 1977년에 그가 신림/시흥동 지역 철거민들을 이끌고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시흥)|신천동]]/[[은행동(시흥)|은행동]] 일대에 세운 마을이었으나, 2007년부터 복음자리 일대에 신천동 LH 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거의 철거되었다. 현재 복음자리가 남긴 유산으로는 작은자리 사회복지관과 복음자리 딸기쨈[* [[가톨릭]] 신자라면 [[성당]]에서 [[미사]] 끝나고 부녀회가 파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이 있다. == 가족관계 == 부인 신명자 여사와 세 명의 딸을 두었다. == 선거 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 [include(틀:한겨레민주당)] || 15,031 (12.3%) || 낙선 (4위) ||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군포/시흥) || [include(틀:민주당(1991년))] || '''48,406 (47.1%)''' || '''당선 (1위)''' ||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시흥) || [include(틀:통합민주당(1995년))] || '''25,584 (42.9%)''' || '''당선 (1위)''' || [* 1997년 통합민주당, 신한국당 합당으로 한나라당 입당.[br]1999년 임기중 작고.] || [[분류:제14대 국회의원]][[분류:제15대 국회의원]][[분류:민주당(1991년) 국회의원]][[분류:통합민주당(1995년) 국회의원]][[분류:한나라당 국회의원]][[분류:고성군(경상남도) 출신 인물]][[분류:칠원 제씨]][[분류:1944년 출생]][[분류:1999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자유주의자]][[분류:폐암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