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외척]][[분류:중구(인천) 출신 인물]][[분류:연일 정씨]][[분류:1749년 출생]][[분류:1776년 사망]] 鄭厚謙 [[1749년]]([[영조]] 25) ~ [[1776년]]([[정조(조선)|정조]] 원년) [목차] == 개요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 정씨|연일]](延日), 자는 백익(伯益). 초명은 정인대(鄭麟大)[[http://sjw.history.go.kr/id/SJW-F33050030-00500|#]]. [[화완옹주]]의 양자이자 [[외척]]이다. == 생애 == 1749년 [[경기도]] 인천도호부 [[제물포]](현 [[인천광역시]] [[중구(인천)|중구]])에서 생선장수 정석달(鄭錫達)[* 1757년 참봉을 시작으로[[http://sjw.history.go.kr/id/SJW-F33050030-00500|#]], 정후겸의 후광을 입어 1759년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http://sjw.history.go.kr/id/SJW-F35030200-03000|#]]·감찰(監察)[[http://sjw.history.go.kr/id/SJW-F35050280-00900|#]]·연기현감(燕岐縣監)[[http://sjw.history.go.kr/id/SJW-F35090250-00600|#]], 1765년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http://sjw.history.go.kr/id/SJW-F41040250-01300|#]]·배천군수(白川郡守)[[http://sjw.history.go.kr/id/SJW-F41080050-00300|#]], 1768년 대구판관(大丘判官)[[http://sjw.history.go.kr/id/SJW-F44120210-00900|#]], 1772년 서흥부사(瑞興府使)[[http://sjw.history.go.kr/id/SJW-F48010230-02300|#]]·상주목사(尙州牧使)[[http://sjw.history.go.kr/id/SJW-F48120210-00900|#]] 등 문과는 커녕 생원·진사시에도 등과하지 않았는데도 정3품 요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의 6형제[* [[http://sjw.history.go.kr/id/SJW-G00040150-01800|#]]]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생가 형인 정일겸(鄭日謙, 1747년생)은 1771년(영조 47) 식년시 진사시에 2등 17위로 급제하고[[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71_024219|#]] 1772년(영조 48) 정시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772_010266|#]] 1775년 정3품 좌부승지(左副承旨)[[http://sjw.history.go.kr/id/SJW-F51080030-02400|#]]에 이르렀다. 본생가 첫째 동생 정시겸(鄭時謙, 1754년생)은 1773년(영조 49) 증광시 진사시에 1등 4위로 급제하고[[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73_024401|#]]] 이후 1757년(영조 33) 족숙인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과 [[영조]]의 서녀 화완옹주에 입양되었다.[[http://sjw.history.go.kr/id/SJW-F33050030-00500|#]] === 영조 생전 === 당시 [[영조]]에게 가장 총애받던 딸 [[화완옹주]]의 [[양자]]이다 보니 정후겸도 덩달아 영조에게 많은 총애를 받았다. 1764년(영조 40) 장원서봉사(掌苑署奉事)[[http://sjw.history.go.kr/id/SJW-F40040180-00800|#]]·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http://sjw.history.go.kr/id/SJW-F40070170-01900|#]]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765년 식년시 생원시·진사시에 각각 3등 57위[[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65_023784|#]], 2등 10위[[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65_023812|#]]로 급제하여 같은 해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http://sjw.history.go.kr/id/SJW-F41080060-01400|#]]·세자익위사위수(世子翊衛司衛率)[[http://sjw.history.go.kr/id/SJW-F41090240-01000|#]]에 제수되었다. 1766년(영조 42)에는 정시 문과에 을과 1위(아원)으로 급제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766_009953|#]]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제수되었다.[[http://sjw.history.go.kr/id/SJW-F42030110-01100|#]] 이후 1767년(영조 43) 수찬에 올랐고, 이어 부교리·지평을 지내고 1768년 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거쳐 호조참의·호조참판·공조참판을 지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정후겸은 [[김귀주]]와 함께 혜경궁 홍씨와 [[정조(조선)|세손]]을 공격하는 등의 모략을 많이 세웠다고 하며, 세도가로 혜경궁 홍씨의 숙부였던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1775년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할 것을 선언할 때에도 강력히 반대했고 [[동궁]]에 사람을 비밀스럽게 보내어 세손의 언동을 감시케 하기도 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고 부사직(副司直)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을 탄핵하는 등[[http://sillok.history.go.kr/id/kua_15112021_002|#]] 세손을 모해하는 데 분주하였다. === 영조 사후 === 정조 즉위 후 정조에 반대했던 노론 세력이나 화완옹주의 힘이 줄고, 정조의 측근인 홍국영, [[채제공]]이나 [[소론]], [[남인]] 등이 힘을 얻으면서 정후겸도 힘이 줄어든다. 정조 즉위 후 대신들이 정후겸을 죽일 것을 요청하면서 결국 [[함경도]] [[경원군|경원도호부]]에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정조 암살 시도가 일어나자 결국 [[사사]]되었다. === 사후 === [[순조]] 때 역적으로 단죄되었지만 1908년([[순종(대한제국)|순종]] [[융희]] 2) 내각 총리 대신이자 매국노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 등의 건의로 복권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b_10101030_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