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인 전 공무원, rd1=정재근(공무원), other2=동명이인인 독립운동가, rd2=정재근(독립운동가))] ||<bgcolor=#ffffff,#191919><table width=100%> '''{{{#000000,#e5e5e5 정재근의 수상 및 영예 }}}''' || ||<bgcolor=#ffffff,#19191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table align=center>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 ||<bgcolor=#003fff> '''[[2003-04 KBL 챔피언결정전|{{{#ffffff 2004}}}]]''' || ---- [include(틀:KBL 월간 MVP(1997 시즌))] ---- [include(틀:KBL 역대 식스맨상)] ---- [include(틀:KBL 베스트 5(1997 시즌))] ---- [include(틀:KBL 역대 자유투상)] }}} || ||<-2><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aaaaaa><table bgcolor=#ffffff,#191919><tablealign=center>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DDDDDD 0%, #FFFFFF)" {{{+1 {{{#000000,#e5e5e5 ''' 대한민국의 농구감독 '''}}}}}}}}} || ||<-2> [[파일:정재근 천하의 XX놈.jpg|width=430]] || || '''이름''' || 정재근(鄭再根) || || '''생년월일''' || [[1969년]] [[7월 23일]] ([age(1969-07-23)]세)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신지''' || [[경상남도]] [[고성군(경상남도)|고성군]] || || '''출신학교''' || [[마산고등학교|마산고]] - [[연세대학교|연세대]] || || '''종교''' || [[불교]] || || '''포지션''' || [[센터(농구)|센터]] → [[파워 포워드]] → [[스몰 포워드]] || || '''신체 사이즈''' || 192cm, 87kg[* 1995년 기준[[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0200329130001&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5-11-02&officeId=00032&pageNo=30&printNo=15585&publishType=00010|참고]].] || || '''프로입단''' || 1992년 [[안양 KGC인삼공사|서울방송 농구단]] 입단 || || '''소속팀''' || [[안양 KGC인삼공사|서울방송]] (1992~1997) [br][[파일:external/heyto25.files.wordpress.com/lo3.jpg|width=40]] '''[[안양 KGC 인삼공사|안양 SBS 스타즈]] (1997~2000)''' [br] [[파일:대전현대걸리버스_logo.png|width=40]] '''[[전주 KCC 이지스|대전 현대 걸리버스]] (2000~2001)''' [br] [[파일:attachment/kcclogo.png|width=40]] '''[[전주 KCC 이지스]] (2001~2005)''' || || '''지도자''' || [[파일:attachment/kcclogo.png|width=40]] [[전주 KCC 이지스]] 코치 (2005~2007) [br]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YonseiUniversityEmblem.svg.png|width=30]] [[연세대학교]] 코치 (2007~2011) [br]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YonseiUniversityEmblem.svg.png|width=30]] [[연세대학교]] 감독 (2011~2014) || || '''등번호''' || 14 || || '''국가대표 경력''' || 올림픽 1회(1996) [br] FIBA 세계선수권 2회(1990[* 연세대 3학년 때 첫 선발.],1994) [br] 아시안게임 3회(1990,1994,1998) [br] FIBA 아시아선수권 4회 (1991~1997) || || '''수상내역''' || [[1992-93 농구대잔치]] 신인상(실업) [br] 농구대잔치 베스트 5 3회 (94,96,97) [br] [[1995-96 농구대잔치]] 득점상/리바운드상 [br] KBL 자유투상 (97) [br] KBL 베스트 5 (97) [br] KBL 최우수 후보선수상 (02) [br] KBL 챔피언 (04) [br] 1990 베이징 아시안게임 {{{#orange 동메달}}} [br]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silver 은메달}}} [br]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silver 은메달}}} [br] FIBA 아시아선수권 '''우승 1회'''(97[* 현주엽, 서장훈의 부상으로 인해 전희철과 단 둘이서 포스트를 지켜내며 28년만의 우승을 이끈다.]) [br] / 준우승 2회(91,95) / 3위 1회(93) || [목차] == 소개 ==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이자 전 지도자. 현역 시절에는 최고의 포워드로 명성을 날렸다. 별명은 저승사자. == 고교-대학 시절 == 중학교 때는 [[배구]]와 [[높이뛰기]] 선수였으나, 마산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농구를 시작했다. 상당히 늦게 출발했지만 성장 속도가 빨라 각 대학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막 감독직을 맡았던 [[최희암]] 당시 [[연세대학교]] 감독이 엄청 공을 들여 스카우트한 선수라고 한다. [[연세대학교]]에서 대학 최고의 [[센터(농구)|센터]] 겸 [[파워 포워드]]로 활약하며 동기 [[이상범(농구)|이상범]], 후배 [[오성식(농구)|오성식]], [[문경은]], [[김재훈(농구)|김재훈]], [[이상민(농구)|이상민]] 등과 함께 [[연세대학교]] 전성기의 막을 열었다. 기존까지는 대학부에서도 중앙대에 밀려 다크호스 정도로 여겨지던 연세대가 정재근의 입학 이후 월등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4학년이던 [[1991-92 농구대잔치]]에서는 연세대 농구부 사상 최고 성적인 4위까지 올랐다. 무엇보다 정재근의 연세대 시절이 유명했던 이유는, 정재근 재학시절 정기 연고전 4년 연속 승리를 비롯하여 공식대회에서 고려대에는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1988~1991년 당시 고려대는 중앙대, 연세대에 알짜선수를 다 뺏긴 동네북 수준이었다.[[정인교(농구)|정인교]], [[김상식(농구)|김상식]] 정도가 에이스였고 골밑의 높이는 대학부에서도 하위권이었다.] 졸업 당시 현대전자행이 거의 확정적이었으나 새로 창단한 [[안양 KGC인삼공사|서울방송 농구단]]의 지원 차원에서 [[안양 KGC인삼공사|서울방송]]의 창단 멤버로 실업 무대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 실업-프로 시절 == [[파일:오성식-이상범-정재근.jpg|width=305]] 실업 무대에서도 뛰어난 포워드로 인정받았다. 연세대, 중앙대 출신 졸업생들로 구성된 신생팀 [[안양 KGC인삼공사|서울방송]]의 확실한 에이스로서 데뷔 첫해부터 팀을 단숨에 돌풍의 중심으로 이끌었고, 1992 코리안리그 실업대회 2차리그에서는 신생팀임에도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어 열린 [[1992-93 농구대잔치]]에선 서울방송을 최종순위 6위로 이끌었고, 정재근 본인은 [[농구대잔치]] 실업부 신인상을 차지했다. 이듬해 서울방송 돌풍의 주역이었던 [[표필상]], [[이상범(농구)|이상범]], 남경원을 비롯하여 [[이창수]], [[오성식(농구)|오성식]] 등과 함께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입대, 사상최강의 상무팀을 구성하게 된다. 정재근과 오성식이 맹활약한 상무는 [[1993-94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진출하는 돌풍을 일으키지만, 당시 엄청난 인기와 실력을 자랑하며 '''태풍'''을 일으킨 모교 [[연세대학교]]에게 1승 3패로 지면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제대 후 [[안양 KGC인삼공사|서울방송]]으로 돌아와 정상급 포워드로 군림했다. 하지만 오성식-정재근-표필상이 이끄는 서울방송은 매번 우승 문턱에서 [[서울 삼성 썬더스|삼성전자]],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기아자동차]], 고려대에 깨지면서 좌절했고, 정재근 복귀 후 서울방송의 최고 성적은 [[1994-95 농구대잔치]]에서의 4위가 한계였다.[* 제대 첫해인 94-95 농대 4위(4강에서 삼성전자에 패배), 95-96 농대 5위(8강에서 기아자동차에 패배), 96-97 농대 공동 5위(6강전에서 현주엽의 고려대에 패배)] 농구대잔치 당시 정재근은 [[전희철]], [[현주엽]], [[문경은]] 등과 함께 높은 체공력을 자랑하는 덩커 중 한명으로 유명했는데, '철봉덩크', '작대기덩크'로 불리는 어설픈 덩크만 해도 오빠부대들이 자지러지던 시절, 차원이 다른 탄력을 바탕으로 높게 나는 듯한 덩크를 수차례 보여주었고, [[1993-94 농구대잔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연세대 [[서장훈]]을 앞에두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작렬하기도 했다. 거기에 1994-95 농구대잔치 올스타전에선 당시엔 정말 보기힘들었던 원맨 앨리웁을 성공시키기도. ~~근데 두 번째 덩크를 못넣어서 우승을 못했다;;~~ 프로 출범 후에도 활약은 이어졌는데, 프로 원년인 1997 시즌에 주전 [[파워 포워드]]로 뛰며 평균 21.1점을 넣으면서 그 해 베스트 5에 선정되었다. 이후에는 외국인 선수들의 활용이 본격적으로 늘면서 약간 활약이 줄었지만, 1997-98 시즌과 1998-99 시즌 모두 각각 평균 15점 이상을 넣으며 팀 토종 에이스의 위치는 굳건했다. 하지만, 1999-2000 시즌에 부상과 슬럼프에 빠지며 평균 두 자리 수 득점에 실패했고, 그의 빈 자리는 [[김성철]]과 [[윤영필]]이 이미 탄탄하게 메워놓은 상태였다. 결국 재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팀의 사정과 재기를 위해 다른 팀에서 기회를 얻고 싶던 정재근의 사정이 맞물려 [[김재훈(농구)|김재훈]]과 1:1 트레이드 형식으로 [[전주 KCC 이지스|대전 현대 걸리버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돌고 돌아 현대로~~ 사실 이 시점부터 [[서울 SK 나이츠]]를 제외한[* 국보센터 [[서장훈]]이 있었다.] 나머지 9팀이 모두 외인 2명을 포스트맨으로 뽑는 것으로 정책을 바꾸기 시작했고[* 이는 초창기 193cm 미만 1명, 205cm 미만 1명이던 외국인 선수 영입 규제가 '''2명의 신장 합계 398.78cm 미만'''으로 완화되면서 195 가량의 외인 2명을 뽑는 실리주의(?)로 트렌드가 바뀐 것이 컸다.], 이는 KBL에서 국내 4번 선수들의 경쟁력이 더 이상 없음을 나타냈다.[* 붙박이 국대 4번 멤버들이었던 에어본 전희철, 저승사자 정재근, 매직히포 현주엽 모두 이 시점부터 3번으로 전환했다. 지금 트랜드로 봐도 4번으로 경쟁력 없는 하드웨어이긴 했다.] [[파일:정재근현대.jpg]] [[파일:정재근 2001-2002 시즌.jpg]] [[파일:2003-04시즌 KCC소속의 정재근.jpg]] [[파일:정재근_KCC이지스.jpg]] 마침 이 당시 [[전주 KCC 이지스|대전 현대]]는 [[신선우]] 감독의 지휘 아래 포워드들이 주축이 되어 모두 달리고 1:1을 구사하는 이른바 토털 바스켓볼을 구사하던 시점이었고, 괜찮은 포워드인 정재근의 합류로 포워드 층은 더 두터워졌다. [[스몰 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한 정재근은 팀의 믿음 아래 2000-01 시즌 두 자리 수 득점을 올리며 부활했고, 2001-02 시즌 [[전주 KCC 이지스|전주 KCC]][* 구단이 KCC로 넘어가고 [[연고지 이전|연고지가 옮겨지면서]] 팀명이 [[전주 KCC 이지스]]가 되었다.]에서는 식스맨으로 좋은 활약을 보이며 식스맨상을 수상했다. 2002-03 시즌에는 새로 합류한 [[전희철]]이 [[전주 KCC 이지스|전주 KCC]]의 시스템 농구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면서 주전급 플레잉 타임을 얻기도 했고, 전희철이 방출되고 [[조성원]]이 들어온 2003-04 시즌에는 다시 식스맨으로 돌아가 [[이상민(농구)|이]]-[[조성원|조]]-[[추승균|추]] 트리오 및 최강 외인 [[찰스 민렌드]]를 보좌하며 전주 KCC의 전신인 대전 현대 시절을 포함해서 통산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한다. 2004-05 시즌 준우승을 끝으로 현역생활을 마쳤다. == 국가대표 경력 == 연세대 3학년 시절이던 1990년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때 처음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까지 9년간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국대 데뷔 초반에는 뛰어난 탄력을 바탕으로 주로 골밑자원으로 뛰며 레전드 센터 [[김유택]]의 파트너 자리를 채웠고,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 등 탄력좋은 후배들이 대거 등장한 이후엔 내외곽을 가리지 않는 전천후 포워드로서 뛰었다. 다만 90년대 한국농구의 전술이 주로 [[서장훈]]을 골밑에 박고 ~~[[강동희]]~~-[[허재]](or [[이상민(농구)|이상민]])의 투가드와 전문 3점슈터 [[문경은]]에, 4번자리에 [[현주엽]], [[전희철]], 정재근을 돌려막는 전략이다보니, 슛거리도 길고 돌파력도 좋았던 정재근은 국대에서 대부분 골밑 자원으로만 이용되었다. [* 마찬가지로 국내 대회에서는 문경은보다 무서운 공수겸장 스몰포워드였던 [[김영만(농구)|김영만]]은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다.어차피 193cm의 신장으로 중국의 2m대 스윙맨들을 막을수 없기는 매한가지라..] 그러다보니 대 중국전 등에서 하드웨어의 한계가 명확했고, 정재근을 비롯한 꼬꼬마 4번 선수들은 중국의 장신 포스트맨들에게 속절없이 리바운드를 내주곤 했다. 물론 세계선수권 및 올림픽에서는 더 심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출전 도중 주장 [[허재]]가 정재근의 생일축하를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한잔 했다가 졸지에 '''"애틀랜타 올림픽 농구팀 음주파동"'''이란 타이틀 하에 가뜩이나 올림픽에서 전패 중이던 대표팀에 대한 여론에 기름을 부으며 ~~퐈이아~~ 귀국 후 농구협회로부터 국가대표 3개월 자격정지를 받기도 했다.[* 주동자(;;) 허재는 6개월 자격정지, 막내로 참가했다는 이상민, 현주엽은 각각 근신 3개월씩 받았다.][*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은 비록 전패했지만 한국이 마지막으로 출전한 올림픽이다. 즉 상당히 좋은 로스터 였고 국내농구인기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였다.] 그래도 국가대표 정재근도 찬란히 빛났던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1997 리야드 아시아선수권 대회였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의 7전 전패 굴욕을 갚고자 절치부심한 농구협회는 [[서장훈]]을 합류시키면서 ~~[[강동희]]~~-[[이상민(농구)|이상민]]-[[문경은]]-[[현주엽]]-[[서장훈]]이라는 '''그나마''' 최강의 라인업을 가지고 대회에 참가하였으나[*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음주파동의 주동자(!!) 허재는 징계기간 동안 무려 무면허 음주운전을 저질러 대한농구협회로부터 선수 자격정지 및 국가대표자격 영구박탈의 중징계를 받았다. 정말 여러 의미로 대~~~~ 단하다.] 불운하게도 한국에서 출국하기 직전 연습경기에서 현주엽이 코뼈가 주저앉는 부상을 입었고, 사우디에 입국해서는 기둥센터 서장훈이 중이염에 걸려 게임을 뛸 상태가 아니라는 판단을 받게 된다. 선수대체를 할만한 상황이 아니다보니 사실상 엔트리 10명만 가지고 경기를 해야만 했고, 특히나 중국에 맞상대할만한 골밑이라던 [[현주엽]]-[[서장훈]] 콤비가 졸지에 단신(193cm) 4번 정재근에 몸싸움 혐오증(;;) [[전희철]] 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우려는 현실이 되어 8강 2차리그 첫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한수 아래로 평가했던 일본[* 많은 팬들이 기억하는 혼혈 포워드 마이클 다카하시(198cm)와 NBA 진출을 시도했었던 아키후미 야마자키(216cm)가 지키는 골밑의 높이가 월등했다.]에 골밑을 털리며 패배했고, 이바람에 아시아 최강 중국을 4강에서 만나고 만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8강 멤버가 건재한데다 약관의 [[왕즈즈]](215cm)까지 가세한 중국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로 여겨졌으나... 이게 웬일?? 허재가 음주 사고를 내면서 급 구성된 투 가드 ~~강동희~~, [[이상민(농구)|이상민]]의 리딩 하에 [[문경은]](or [[우지원]])-정재근-[[전희철]]은 쉴새없이 움직이고 달리고 던지면서, 마치 20년 후인 '''현대 농구의 스몰라인업 시스템에서 장점만을 고스란히 보여주었고''', 키는 크지만 느렸던, 그리고 많이 방심하고 나왔던 중국을 계속 앞서나가며 결국 86:72라는 놀라운 승리를 거둬낸다. 이 경기에서 정재근은 본인의 탄력과 스피드를 활용하여 쉴새없는 컷인과 돌파로 중국의 장신숲을 뚫어내면서 승리의 주역이 된다. (아직 어린 왕즈즈의 허공을 가르는 블록 시도들은 덤) 이후 대표팀은 결승에서 일본과 재격돌하여 78:76 단 두 점차로 신승, 28년만의 아시아선수권 대회 우승이자 현재까지 대한민국 농구대표팀의 단 2개뿐인 타이틀을 가져오게 된다. 4강 중국전까지의 활약만 보면 [[포인트 가드]] ~~강동희~~와 정재근이 가장 돋보였으나, 결승전에서 일본의 장신센터 야마자키에게 현란한(?) 헐리웃 액션을 과시하며 오펜스 파울 2개를 얻어내며 활약한 전희철이 대회 MVP에 올랐다. == 지도자 경력 == [[파일:정재근_김광코치.jpg|width=400]]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4_978254_14049710141425194.jpg]] 2005년을 끝으로 은퇴해 2시즌 동안 [[전주 KCC 이지스]]의 코치 생활을 했고 모교인 [[연세대학교]]로 옮겨 코치를 거쳐 2011년 11월 15일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감독으로 재임 중인 2014년, 제1회 아시아 퍼시픽 대학농구에서 [[고려대학교]]와의 결승전을 치루던 도중, 15점차로 밀리다가 40:35로 따라잡았고, 기어이 3쿼터에 고려대를 겨우 9점으로 봉쇄한 덕에 잠시 16점차로 역관광하여 앞서고 있다가 4쿼터에 13점차를 따라잡히고 동점을 허용하자 작전 타임 와중에 [[연세대학교]] 선수들에게 '''쌍욕을 퍼붓는 장면이 [[한국방송공사|KBS]]의 중계를 타고 고스란히 생방송'''되었다. 연장전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연장전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가격하려하다가 밀치고 [[박치기]]'''하는 병크를 터뜨렸다.[* 참고로 이 판정은 정심이었다. 연세대의 [[박인태|모 선수]]가 파울이 아니라면 놓칠 수 없는 이지샷을 놓치는 바람에 파울로 오해했던 측면도 있다. 이 선수는 몇 달 뒤 결승전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논개 or 감독킬러~~][* 정재근에게 박치기를 당한 황인태 심판은 이후 아시아 최초로 '''NBA의 초청을 받아''' 2020년 1월부터 Referee Development Program에 참여하게 된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1061447386219|#]] 참고로 해당 프로그램을 수료하면 NBA 심판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테크니컬 파울로 퇴장을 선언받았으나 코트에서 한동안 나가지 않고 또다시 쌍욕을 퍼부었다(...). 그 바람에 [[고려대학교]]가 테크니컬 파울로 인해 자유투 4득점을 했으며, 결국 대회는 라이벌 [[고려대학교]]가 87-80으로 우승하면서 종료. [[http://sports.media.daum.net/sports/basketvolley/newsview?newsId=20140710145737869|참고기사]]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ketball&ctg=news&mod=read&office_id=064&article_id=0000004133&m_url=%2Fcomment%2Fall.nhn%3FserviceId%3Dsports%26gno%3Dnews064%2C0000004133%26sort%3Dlikability|다른 참고기사(동영상포함)]] 그 뒤 모교의 감독직에서 자진 사퇴하였으며, [[연세대학교]]에서는 자체적으로 직무 정지 [[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category=mbn00011&news_seq_no=1881992|처분을 내렸다.]] 이후 농구협회에서 열린 상벌위원회에서 5년 자격정지 처분의 징계를 받아 [[은희석]]에게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ket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829576|감독직을]]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ket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829578|넘기게 됐다.]][* 은희석 감독 취임 이전에는 [[진상원]] 코치가 감독 대행직을 맡았다.] 공교롭게도 은희석 감독이 부임한 이후 연세대는 승승장구하며, 대학리그 5연속 우승을 달성한다. 실력은 정말 빼어났고, 사생활도 깔끔했지만, 코트 안에서의 큼지막한 폭력 사건을 많이 일으킨 점이 아쉬운 농구인이다. == 기타 == [[흑역사]]가 상당히 많은 선수다. 저승사자라는 별명답게 코트에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준 선수지만, [[다혈질]]적인 성격 탓인지 사고도 은근히 많이 쳤다. 대학 시절에는 [[중앙대학교]]와의 시합 도중에 상대 선수 [[장일(농구)|장일]][* 중앙대-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포워드로 키는 188cm이다. 중앙대의 대승으로 승패가 결정된 상황에서 장일이 드리블 잔재주를 부리자 그대로 날렸다.]을 가격했다가 중징계를 먹은 적이 있고,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선수와는 [[국군체육부대]]에서는 말년 병장과 신병으로, 프로농구 S본부에서는 코치와 선수로 한솥밥을 먹었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도중 음주 파동으로 3개월 자격 정지, 1997-98 시즌 [[안양 KGC인삼공사|SBS]]와 [[원주 DB 프로미|나래]]의 경기 도중에 [[제이슨 윌리포드]]와 시비가 붙으면서 프로농구 사상 최초의 난투극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 이 때는 사실 [[제이슨 윌리포드|윌리포드]]가 먼저 밀쳤지만, 정재근의 수비도 거칠었다.] 마지막으로 바로 아래에 서술되어 있는 일명 저승타 사건으로, 2002-03 시즌 도중에 [[서울 삼성 썬더스]] 소속인 [[박성훈(1978)|박성훈]]의 턱을 가격해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2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먹은 사건까지. 아들 정호영(190cm)은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와는 달리 고려대로 진학해 농구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포지션은 [[슈팅 가드]]. === [[박성훈(1978)|박성훈]] 가격 사건 (2002-03 시즌) === [[파일:1614307447812.gif]] 2003년 1월 9일, 전주 KCC 대 [[서울 삼성 썬더스|서울 삼성]]과의 현대-삼성가 라이벌전에서 당시 2년차였던 [[박성훈(1978)|박성훈]](195cm, 경희대 졸)은 신인급 선수답게 패기가 넘치다못해 터져 나올 지경(?)이었는데, 경희대 시절엔 어중간한 신장의 센터자원이었으나 KBL 데뷔 후엔 동급 대비 월등한 스피드로 장신수비수로서 많은 기회를 받으면서 매 경기마다 매치업 상대를 거칠게 수비하고 있었다. 이 날 경기에서도 한참 선배인 정재근, [[전희철]], [[추승균]] 등을 상대로 쫄지않고 엄청 후려쳐(?)댔고, 경기 중 전희철의 공을 스틸하면서 코피를 터뜨리기도 했다. 게임도 서울 삼성쪽으로 원사이드로 흘러가던 후반 중반, 공을 가지고 있던 박성훈은 매치업이던 정재근을 도발했고 공을 가드에 넘긴 후 스크린을 걸어주러 갔는데, 정재근은 박성훈의 스크린에 걸리는 척하면서 양 팔꿈치를 힘껏 ~~[[을용타|저승타]]로~~ 박성훈의 턱에 갈겼고 박성훈은 그대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다. 이후 뉴스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턱을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박성훈의 윗앞니가 아랫턱에 박히는(...) 하마터면 사람을 정말로 저승 보낼 뻔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 이후가 더 어이없는 게, 같은 팀 선수가 이 정도로 맞았음에도 [[서울 삼성 썬더스|서울 삼성]] 선수들이 정재근에게 달려들기는커녕 정재근을 말리고 있었고, [[서울 삼성 썬더스|서울 삼성]]에서 뛰던 박성훈의 친형 [[박성배(농구)|박성배]]도 짬이 안 되는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이후 뉴스나 언론보도 모두 "정재근이 얼마나 착한 선수인데, 그랬겠느냐~"라는 식이었고, ~~사람하나 저승보낼 뻔한~~ 저승사자 정재근은 달랑 2경기 출장정지만 받고 끝났다. 이후 [[박성훈(1978)|박성훈]]의 수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얌전해졌고, 출장시간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 관련 문서 == * [[농구 관련 인물(한국)]] * [[안양 KGC인삼공사/선수단]] * [[전주 KCC 이지스/선수단]] * [[불교/인물]]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농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농구 감독]][[분류:경상남도 출신 인물]][[분류:고성군(경상남도) 출신 인물]][[분류:1969년 출생]][[분류:1992년 데뷔]][[분류:2005년 은퇴]][[분류:스몰 포워드]][[분류:안양 KGC인삼공사/은퇴, 이적]][[분류:전주 KCC 이지스/은퇴, 이적]][[분류:마산고등학교 출신]][[분류:연세대학교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