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1402031114318631.jpg|width=150]] 鄭寅普 1893년 5월 6일~1950년 11월경[* [[북한]] 내에 조성된 [[재북인사릉]]에는 1950년 9월 7일 폭격으로 인한 [[사망]]으로 된 상태이다. 다만 이 사망일은 납북자들의 죽음을 [[미국]] 탓으로 돌리려 [[조작]]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니 걸러 들을 필요는 있다.] == 개요 == [[일제강점기]]의 한학자, [[역사]]학자, [[교육]]자. 호는 위당(爲堂). 저서로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으며 주로 [[조선]]의 [[혼|얼]]을 강조했다. == 생애 == [[세도정치]]기의 대신이었던 [[정원용]](鄭元容)의 현손으로 1893년 [[한양|한성부]] 종현동[*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충청도]] 일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이때 정인보의 [[스승]]이 된 사람이 [[이건방]]인데 그의 집안은 [[양명학]]을 대대로 연구한 가문이었다. 그로부터 정인보는 한학뿐 아니라 양명학적 사상까지 함께 받아들인다.[* 이는 1933년 양명학연론이라는 저서를 저술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10년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 [[상하이]]와 [[한반도]]를 오가다가 상하이에서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교포에 대한 계몽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귀국하여 국내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경성부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 등에서 한학, 역사학 등을 가르쳤다. 1930년대 [[안재홍]][* 6.25 전쟁 중 정인보와 함께 납북된다.] 등과 '조선학운동'을 전개하는데 [[식민사학]]에 맞서 조선 내에도 근대적인 흐름이 있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민족 사학 운동 중에 [[일본]]의 [[광개토대왕릉비]] 왜곡에 대해 반박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실학]] 사상에서 근대적인 사고를 발견하려 했는데 1935년 [[정약용]] 사후 100주년을 맞아 펴낸 '여유당전서'는 그 성과였다. 1935~1936년 동안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했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 국사학, 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쳐 강의를 하였으며 이때 발음의 유사성을 들어 숙신이 [[고조선]]의 일부라는 학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국학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족들과 [[전라북도]] [[익산시|익산군]]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서울로 상경하여 국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946년 [[국학대학]]이 설립되자 학장에 취임한다.[* 국학대학은 1966년 [[우석대학교(서울)|우석대학교]]와 합병되며 우석대학교는 1971년 [[고려대학교]]에 인수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감찰위원장(오늘날 [[감사원장]])에 임명되었으나 [[이승만]]의 측근인 [[임영신]]이 선거 중 저지른 비리를 적발해 파면을 요구하였다가 도리어 경질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때 서울에 고립된채 납북되었다.[* 그의 납북에 연희전문학교 시절 친구였던 사학자 [[백남운]]이 관계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정인보는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죽자 그의 묘지문을 쓸 정도로 알아주는 한학자였던 덕분에 백남운이 고서를 읽고 해석하는데 정인보의 덕을 많이 보았다. 전쟁이 터지자 친구의 신변 보호 겸 [[번밀레|번역 노예]]로 쓰기 위해 납북에 관여했다는 얘기도 있다.] == 기타 == 자녀들로는 정정완, 정경완, 정연모, 정양완, 정양모 등이 있다. 정정완은 침선장(전통 바느질 기법) [[무형문화재]]였다. 정경완은 [[홍명희]]의 아들인 홍기무와 [[결혼]]했으며 남북협상 때 시아버지인 홍명희와 함께 [[평양]]으로 갔다가 북한에 정착했다. 정양완과 정양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학을 공부했다. 정양완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문학 교수를 지냈으며 아버지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했다. 정양완의 남편은 국어학자인 강신항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성추행]]으로 문제를 일으킨 [[강석진(수학자)|강석진]] 전 [[서울대학교]] 교수가 큰아들이다. 정양모는 [[국립경주박물관]] 및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냈다.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 [[한글날]]을 제외한 5대 [[국경일]] 노래의 노랫말을 작사하기도 했다. 한글날 노래는 외솔 [[최현배]]가 작사. 현재 그가 강의를 했었던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에는 최현배의 호를 딴 '외솔관'과 함께 정인보의 호를 딴 '위당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역사학자]][[분류:납북자]][[분류:1893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중구(서울) 출신 인물]][[분류:동래 정씨]][[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ㅈ]][[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고려대학교 재직]][[분류:연세대학교 재직]][[분류:재북인사릉 안장자]][[분류:동아일보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