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경주 정씨]][[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1896년 출생]][[분류:1936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 || 성명 ||정수기(鄭守基) || || 이명 ||정내익(鄭乃益)·정지화(鄭志化) || || 본관 ||[[경주 정씨]] || || 생몰 ||[[1896년]] [[4월 24일]] ~ [[1936년]] [[1월 10일]] || || [[출생지]] ||[[경상북도]] 경주군 내서면 수룡동[br](현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 수룡마을)[* [[경주 정씨]] 집성촌이다.[[http://www.gyeongju.go.kr/village/geoncheon/page.do?mnu_uid=389&|#]]]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정수기는 1896년 4월 24일 경상북도 경주군 내서면 수룡동(현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 수룡마을)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영남 유림의 원로인 [[김창숙]]과 연락하여 구국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후 1922년 8월 독립운동에 참가할 목적으로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 고문인 김창숙을 찾아갔으며, 당시 김창숙과 함께 [[만주]]·[[내몽골]] 지방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 이익금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고,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서, 그는 1923년 2월 [[손후익]]과 함께 비밀리에 귀국했다. 그는 1923년 4월부터 경상북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김창숙에게 보냈으며, 1925년 7월 비밀리에 [[경성부]]에 온 김창숙을 다시 만나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액의 군자금 모집계획을 지시받고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5년 음력 8월, 대구에서 김화식(金華植)에게 김창숙의 취지문을 제시하고 협력을 구하는 한편, 서울 [[남산공원]]에서 손후익(孫厚翼)·이재락(李在洛)·이동흠(李棟欽)·김동진(金東鎭) 등과 함께 자금 마련을 위해 수차례 접촉하였으며, 조속한 시일 내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별로 분담하기로 하여 정수기 자신은 [[안동시|안동]]·[[영주시|영주]]·[[봉화군|봉화]] 지방을 맡고 활동하였고, 김창숙은 모금된 군자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 이 사이 1926년 6월 4일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한 기록이 있는데, 동명이인인 정수기의 기록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2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947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형사사건부]]] 그러나 1927년 6월 18일 김창숙이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으며, 그는 만주로 피신하였다가 그해 8월에 입국하여 김창숙과 함께 수감되었다. 1928년 8월 6일 대구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05&evntId=0034988744&evntdowngbn=Y&indpnId=000001995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11월 28일 대구복심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2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아[[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05&evntId=0034988746&evntdowngbn=Y&indpnId=000001995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옥고를 치렀다. 이후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36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