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안성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정씨]][[분류:1915년 출생]][[분류:197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주오대학 출신]] ||||<table align=right><bgcolor=white><:>[[파일:정문규.jpg|width=300px]] || || 성명 ||정문규(鄭文圭) || || 일본식 성명 ||智山文圭 || || 본관 ||[[경주 정씨]] || || 생몰 ||[[1915년]] [[8월 11일]] ~ [[1970년]] [[12월 18일]] || || [[출생지]] ||[[경기도]] [[안성시|안성군]] 서운면 현매리[* [[경주 정씨]] 집성촌이다.] || || 사망지 ||[[경기도]] [[안성시|안성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정문규는 1915년 8월 11일 경기도 안성군(현 안성시) 서운면 현매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유한양행|유한제약주식회사]](柳漢製藥株式會社)에서 근무하던 중[* 당시 [[경기도]] [[부천시|부천군]] [[소사구|소사읍]] [[심곡동(부천)|심곡리]](현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부천)|심곡동]])에 거주하였는데, 당시 유한양행 본사가 심곡본동 562번지에 있었다.[[http://bu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cheon&dataType=0403&contents_id=GC016P0552|#]]], 주오대학 동창인 [[최승우(독립운동가)|최승우]] 등에게 “[[임시정부]]에서 중견 간부로서 유식(有識) 조선 청년을 모집하고 있으니 중경으로 가자”며 [[충칭]] 망명을 권유했다. 1943년 3월 이를 결행하여 [[중국]] [[산해관]]까지 갔지만 일제 관헌의 단속으로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1944년 7월 정문규는 “조선 청년 다수가 징용당하면 조선 독립의 때에 능력있는 청년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며 징용을 반대하는 격문을 일본 군용열차 등에 배포하기로 계획하고, 일제 고관들을 암살하고 각종 공장을 폭파하기 위한 폭탄 제조 등을 주도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후 1945년 7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약품취급령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4년형(미결구류일수 중 7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아[[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00&evntId=0034969810&evntdowngbn=Y&indpnId=000000230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석방되었다. 이후 안성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0년 12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정문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