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 align=right><bgcolor=white><:>[[파일:정남용.png|width=300px]] || || 성명 ||정남용(鄭南用) || || 이명 ||정필성(鄭必成), 홍우식(洪宇植) || || 생몰 ||[[1896년]] [[11월 21일]] ~ [[1921년]] [[4월 18일]] || || [[출생지]] ||[[강원도]] [[고성군(강원도)|고성군]] 현내면 철암리 || || 사망지 ||[[서대문형무소]] || ||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 ||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승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정남용은 [[1896년]] 11월 21일 [[강원도]] [[고성군(강원도)|고성]] 현내면 철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건봉사]](乾鳳寺) 승려로, [[1914년]] 이후 경성으로 상경해 휘문의숙(徽文義塾)과 중앙불교포교당(中央佛敎布敎堂)에서 불경을 공부했다. [[3.1 운동]] 이후 [[전협]], 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한 그는 [[1919년]] 5월 최익환이 체포된 후 후임을 맡아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대동단이 발행한 〈선언서(宣言書)〉와 〈임시규칙(臨時規則)〉 등 각종 문서의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당시 대동단은 사회 각층 중 진신(縉紳)·유림(儒林)·상공(商工)·청년(靑年) 등 4개 단(團)을 중심으로 단원 포섭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청년단의 조직을 정남용이 주관했다. 그리하여 [[송세호(1893)|송세호]], [[나창헌]] 등을 가입시키는 등 조직 확대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대동단은 앞서 최익환 등의 피체로 조직의 일부가 노출되었고, 또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 등의 발행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과 함께 동단에 대한 일제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고 있었다. 이에 전협, 정남용 등 대동단의 주요 인사들은 대동단 본부를 상하이로 이전하기로 했다. 먼저 총재 [[김가진]]이 1919년 10월 10일 상하이로 망명했고, 이어 [[의친왕]]을 대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하고 상하이 망명을 추진했다. 1919년 11월 9일, 정남용은 이을규(李乙奎), [[하란사]]와 함께 의친왕을 수행하여 서울을 출발해서 만주 안동(安東)까지 갔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아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된 뒤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1년]] 4월 18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남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강점기의 승려]][[분류:고성군(강원) 출신 인물]][[분류:1896년 출생]][[분류:1921년 사망]][[분류:옥사한 인물]][[분류:건국훈장 독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