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121109018069220_thumb_400.jpg|width=100%]] || || 동상 || 이 인물을 다룬 장편역사소설은 [[정기룡(소설)|여기]]를 참고. 鄭起龍 [[1562년]] ~ [[1622년]] [목차] == 소개 == [[임진왜란]]에 활약했던 [[조선]]의 장수. 본관은 [[정(성씨)|진주]](晉州)로 훗날 곤양 정씨(昆陽 鄭氏)[* 2000년 [[인구조사]]에서 450가구 1416명으로 나타난 희귀 본관이다.]의 시조가 된다. 본명은 정무수(鄭茂壽)였는데, 본래 몰락한 집안의 자제[* 본래 진주 정씨 자체가 [[계유정난]]과 [[갑자사화]]에 박살난 집안이다.]였으나 그의 아내 권씨가 관상을 보아 그의 됨됨이를 알고 그를 성심껏 내조했다고 한다. 그가 무과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갈 때 [[선조(조선)|선조]]가 자다가 꿈에서 종각에서 자는 [[용]]을 보았고, 다음날 종각에 가서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정기룡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무과에 급제하자 선조가 친히 정기룡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정기룡을 주인공으로 한 박상하의 소설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2008)가 출판된 이후 사람들에게 60전 60승 무패의 장수, 육지의 [[이순신]] 등 조금 과장되게 알려졌다. [[광해군]] 때 통제사에 자리에 오르지만 [[후궁]]들에게 뇌물을 써서 승진했다는 소리도 있고 반역에 가담했다는 소리가 있으나 무죄로 판명되었다. 후에 [[영조]] 대에 와서 충의공(忠毅公)으로 격상되었다. == 임란에서의 활약 == 실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장수 [[마귀(명나라)|마귀]]는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을 [[조선]]에서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 [[이순신]], [[권율]]이야 익히 알려져있는 분들이고 정기룡은 당시 나이가 30대 젊은 장수였기에 이례적이다. 한명련은 출생일이 알려지지 않았고 [[이괄의 난]]에 참여해 참살당했으므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세간에 알려진 약력에 의하면 상관인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 첫 전투인 [[거창]]에서 [[기병]] 수십기를 거느리고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금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단기 필마로 구출한 뒤 1592년 9월에 곤양의 수성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기룡은 "[[조운|조자룡]]"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실제 공식적인 기록에서 정기룡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4개월이나 빠른 1592년 5월. 참패로 유명한 [[용인 전투]] 초기에 극소수밖에 참가하지 못한 경상도 병력 중에서 유일하게 전과를 올린 군관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2일 ~ 3일 전 단신으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규모 일본군과 마주치자 이를 '''단신!'''으로 공격해서 격파한 것이다. 당시 경상 감영 아전으로 감사 김수를 수행하던 아전이 남긴 기록 <정만록>에 실린 경상 감사의 장계 사본(실록에는 접수 사실만 보고되고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같은 실록에서 원균의 적전 도주 이야기가 언급됐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에서 처음 나온다. 훗날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금산 전투]]에 참가하게 된 것도 이때의 공훈이 인정된 결과였다. 이 전과에 자극받은 타도 감사들이 세력도 약한 경상 감영만 공훈을 세우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진격을 서두르다가 용인에서 크게 패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51130100812.384.3.jpg]] 감사군(敢死軍)이라는 부대를 이끌고 있었으며 [[명나라]]에서 들어온 [[편곤]]을 무기로 마상에서 편곤을 휘두르면 60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만들어내고, 명 [[황제]] ([[만력제]])도 그의 실력에 감탄해 총사령관 직책인 '''총병''' 벼슬을 내려주었다는데 사실 이는 근거가 불분명하다. === 그러나... === 정기룡의 전공 중에는 '''그의 개인 전공을 집성한 [[매헌실기]]에만 나오는 것이 많다.''' [[행장]]은 개인 기록이라 신뢰할 수 없는 게 많다.~~이런 과대포장된 부분 조차 조자룡하고 똑같은....~~ 상기의 거창 전투는 [[임진왜란]] 육지 첫 승리라고 주장하지만[* 공식적으로 임진왜란 육지 첫 승리는 [[신각]]의 [[해유령 전투]]다.] 이게 다른 사료엔 안 나오고 매헌실기에만 나온다. "본진과 떨어진 상태에서 전투를 했는데 실전은 처음이다 보니 정기룡이 보고해야하는 것을 몰라 그냥 넘어가서 다른 곳엔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하는 편리한 이유를 주장하지만 당연히 확인할 길은 없다.[* 무엇보다도 당시에 없는 전공도 있는 전공처럼 만들고 자기가 잘못해서 패배해놓고도 남탓을 하는 등 허위보고가 판을 치는 당대 모습을 생각해보면 보고를 하지 않았다 운운은 "나 공 세우고도 뭐해야 하는지 모르는 바보요."라고 말하는 것인데, 조선군 최악의 바보인 [[원균]]조차 보고는 허위가 많을지언정 제깍 올렸다.] 이에 대해 [[난중일기]]나 [[징비록]] 등을 들어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둘은 이미 다른 기록과 교차 검증이 완료된 사료로 인정받는다. 실록의 기록에는 정기룡이 [[조선군]]에 투항한 항왜병까지 죽인 경우도 있다. 이때의 실록 기록을 보면 왠지 의미심장하다. 정기룡의 승전 중 상당수가 [[팀킬|아군을 죽이고]] 적군이라 속인 전공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나중에 이른바 순왜들을 다 잡아 죽이려든 일도 있고.[* 물론 순왜들을 경우에 따라서는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은 이상은 풀어주기도 했다.] 전후 7년 뒤 1등 공신에 올라서 일부 사람들이 [[이순신]]과 비교를 하지만 이순신은 선무 1등 공신이고, 정기룡은 '선무원종공신' 1등이다. 즉, 선무 공신에 들지 못한 후보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순신]]과 더불어 선무 1등 공신은 [[권율]], [[원균]] 두 명뿐이다. 그나마도 원균은 선조 혼자 밀어붙였을 뿐이다. 신하들은 그래도 왕 눈치가 보여 원균을 최대한 높은 자리까지 추천했는데 그게 선무 2등 공신이다. 한 마디로 신하들은 '원균은 죽었다 깨어나도 1등은 절대 안 돼.'라고 생각했단 뜻이다. 실질적으로는 권율만이 선무 1등 공신의 자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선무 원종 공신 1등에는 [[조헌]], [[고경명]] 부산포에서 전사한 [[정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영남]] 등이 있으며 3등까지 합해서 18명인 선무 공신과 달리 '''선무원종공신은 총 9060명(...)에 달한다.''' 당연히 수가 적은 선무 공신이 더 끗발이 높다. 실제로 공신에게는 공신전 등이 주어지지만 원종 공신에게는 그런 거 없다. 후손들에게 음직([[음서]])의 혜택 등이 좀 주어질 뿐이다. 또 이러면 정기룡은 혈연이나 파당이 없어서 추천을 받지 않았다고 반론한다. 하지만 그런 논리로 [[서인]]이라도 (그나마도 거의 티를 내지 않았다.)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 오성 [[이항복]]을 [[권율]]이 [[장인]]이라서 공신을 준 정말 썩을 놈으로 만들고 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그럴 의도도 없겠지만, 애초에 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선무공신의 문제는 졸장 원균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순신, 권율과 동등한 선무 공신 1등으로 제수되었다는 것 하나뿐이다. 이순신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혈연과 파당이 있어서 전라좌수사가 된 것도 아니다. 이순신의 가문은 의외로 이전까지만 해도 문신 집안에 가까웠고[* 이랬던 이순신네 가문이 이순신 사후에는 무신 집안으로 바뀐다. 조선은 둘째치고 명나라에서도 찬양한 장군이 배출된 집안이라 반강제적으로 무과에 응시해서 이순신 후손들 중에서 문신은 딱 한 명 배출되었고 나머지는 무신이었다.] 당파 문제를 보면 분명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남인]] [[류성룡]]이 천거한 덕이었다. 당시 이순신은 고작 종 6품이었고 전라좌수사는 정 3품으로 품계로 따지면 '''8계단'''이나 뛰어넘는 있기도 어려운 특진이었고 떄문에 '''류성룡의 친구이자 동문이요 같은 당파인''' [[김성일(조선)|김성일]][* 일본은 쳐들어오지 않습니다! 말했던 그 김성일 맞다.]이 '이순신' 등의 특진을 비판하며 '취소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모함받았을 때도 남인인 [[이원익]]이 옹호하기도 했으나 남인의 영수 격이었던 유성룡은 이순신 모함에 가세하는 등(...) 이순신은 혈연뻘도 파당빨도 받은 적이 '''없다.'''[* 인맥빨은 있지 않냐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실제로 유성룡도 이순신 모함에 가세했을 때 인맥빨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도 했지만 이순신은 정탁도 천거했다.] 그 이순신조차도 혈연빨도 파당빨도 없었는데 정기룡이라고 오죽할까. 다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어쨌건 왜란 와중에 활약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야 후술하겠지만 일본의 침공에 대비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는 일이 벌어진데다가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앉혔다가 제대로 데인 경험이 있는 조선 조정인데, 선조는 물론이고 여타 중신들이 단체로 죄다 미치기라도 한 게 아닌 이상 잘해봐야 평범한 장군을 그 자리에 앉힐 리는 없다. 적어도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실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 앉혔다고 봄이 옳다.[* 이게 논파되려면 이 사람보다 잘난 사람은 이미 다 죽었거나 다 벼슬을 사양했다고 해야 말이 되는데 확실히 전쟁 중에 의병장 다수가 전사하였고 곽재우처럼 벼슬길을 멀리한 이들도 있었으니까 정기룡보다 더 유능함에도 이미 죽었거나 벼슬을 사양해서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한 사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의병장의 경우는 1610년대 이상까지도 살아있던 사람이 많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가설은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당시 시점에서 의병장 [[정문부]]는 장례원 판결사, 호조 참의, 용양위 부호군 예조 참판 등을 거쳤고 [[정인홍]]은 대사헌도 거쳤다. 즉 의병장들 중 곽재우처럼 벼슬을 멀리한 이들도 있었으나 정문부, 정인홍처럼 벼슬길을 나간 이들도 분명 있는 만큼 '정기룡은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으나 단지 다른 뛰어난 인물들이 다 죽어서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는 가설이 성립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명나라]] 장수 [[마귀(명나라)|마귀]]가 [[이순신]], [[권율]], [[한명련]]과 같이 조선 제일의 장수로 꼽았던 것이나, 정기룡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던 시기에 [[북관대첩]]의 주역이었던 [[정문부]]나 훗날 [[영의정]]까지 올랐던 [[정인홍]]같이 왜란에서 활약했고 사서에서도 그 능력이 충분히 검증된 인물들 중 조정에 출사한 이들이 분명 존재했다. 따라서 현재 전하는 기록에 거품이 많을 가능성과 별개로, 정기룡 자체는 충분히 유능한, 적어도 당대에 그렇게 평가받을 만한 수준의 공적을 쌓은 인물이 맞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것도 조자룡이랑 똑같네-- == 전후 == 1601년 울산부사를 역임했고 1610년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일본과의 외교는 재개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여파가 워낙 엄청났던지라 정기룡은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보직되었다. == 기타 == 관련 유적은 [[경상남도]] [[하동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다.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현재도 [[정(성씨)|진주 정씨]] 집성촌이다.]는 정기룡 장군의 고향으로, 그의 탄신지에는 생가와 사당인 경충사(景忠祠) 및 관련 문화재 세 점이 전해지고 있다. 상주시에는 정기룡의 묘소와 사당인 충의사(忠毅祠)가 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2&aid=0000754858|관련 기사]] 상주시에서는 정기룡 장군을 소재로 뮤지컬을 제작한 적도 있다. 은근히 대한민국 육군에서 밀었던 인물인 거 같은데, 해군이 이순신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니 그런 거 같다. 실제로 2010년대 초반에 육군에 비치된 책자에서 정기룡을 이순신과 동급인 조선의 수호신인 것마냥 설명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이 항목만 잘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무리수인 주장이라서 별 호응은 없었던 거 같지만... 2020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전기역사소설 [[정기룡(소설)|정기룡]]이 출간되었다. == 같이보기 == * [[정기룡(소설)]] * [[김덕령]] [각주] [[분류:1562년 출생]][[분류:1622년 사망]][[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조선군/군인]][[분류:진주 정씨]][[분류:하동군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