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전남대학교/학부 및 대학원)] [include(틀:전남대학교)] [목차] == 개요 == 진리, 창조, 봉사를 교시로 하는 전남대학교의 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도로서 갖추어야 할 인격과 덕망을 쌓고, 의학의 기본 진리를 탐구하여 질병을 예방, 치료함으로써 인류 복지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의사와 의학의 발전을 선도할 수 있는 의학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교과 과정의 목적은 1차 진료를 할 수 있는 의사와 창조적인 의학자를 양성하는데 있다. 설립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2년의 의예과와 4년의 본과로 구성된 학사 과정 뿐 아니라,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위한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 역사 == [[의과대학]]은 1944년 광주의학전문학교를 전신으로 한 7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함흥의학전문학교와 동시에 개교했다]. 그 배경에는 [[일본 제국]]이 일으킨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선에서 부상병의 응급 조치를 담당하는 하급 군의관 부족에 허덕이자 1939년부터 종전 직전까지 일본, 조선, 만주 등지에 임시로 의학전문학교들을 설립한 것이었으나, 이전부터 의료 인력의 부족이 극심했던데다가 광주 제중원[* 現 광주기독병원 서울의 그 [[제중원]]과는 다르다. 비슷한 예로 [[계명대학교/학부/의과대학|영남쪽에도 제중원]]이 있었다.]의 외국인 의사 인력을 추방하고 병원을 폐쇄해버려 지역 의료 상황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의 유지들이 나서서 도립광주의원을 모체로 한 의사 양성 기관인 광주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요구했던 것이었다. 이 요구가 여러 차례 거부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1940년부터 광주 의학전문학교 신설을 전제로 도립광주의원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기로 하면서 현실화되었는데, 당시 상황이 [[시궁창]]인지라 말이 공립이지 100만엔[* 당시 기준으로 쌀 20만석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비용이다]에 달하는 의학전문학교 설립 비용을 기부 명목으로 민간에다 떠맡기다시피 해놓고[* 이 어마어마한 비용은 상하이에서 비행기, 군함의 부속품을 생산하는 사업을 하던 손창식이 100만엔 전부 기부해 해결했으며, 천일고무 사장 김영준, 광주극장을 설립한 대지주 집안 출신 최선진 등 유지들도 총 10만엔 등을 기부해 일조했다.] 교사(校舍)는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 몰수한 광주 수피아여학교(現 수피아여자고등학교)로 정하고 도립광주의원을 부속병원으로 전환해 광주의학전문학교를 공립으로 하는 설립 인가만 냈을 뿐 총독부 당국은 사실상 날로 먹은거나 다름이 없었다[* 건립 비용에 대한 부분은 사실 조선, 일본 할 거 없이 비슷했던 것이 일본에서도 각지에 제국대학을 설립할 때마다 막대한 비용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서 상당 부분은 해당 현 지역 주민이나 유지들의 기부금에 의존했었다]. 혼란한 시기에 설립된 광주의학전문학교는 운영 예산도, 비품도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전시 총력 체제였기 때문에 수업,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해방 이후에도 어려운 상황은 변하지 않아, 학병 징집, 징병을 피하기 위해 지원한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 및 교수들이 대부분 돌아가버렸고, 타지에서 온 학생들도 떠나면서 소수의 학생만 남은데다 교사(校舍) 마저도 미군정에 몰수되었다. 학교 건물마저 없는 채로 지금의 광주중앙초등학교와 광주여자고등학교를 전전하다 미군정과의 협의를 통해서 現 광주여자고등학교를 임시 교사로 사용하기로 하고 [[최상채]] 교장과 이종윤 박사는 교수진 영입에 힘을 쏟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유망한 교수진을 많이 데려왔다. 연구 활동 역시 최상채 교장의 주도하에 활기를 띄기 시작하면서 정상화의 궤도에 올라서게 됐으나,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학생들은 피난을 하게 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나마 전쟁의 직접적인 타격을 입어 초토화된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에 비해 건물 피해는 크지 않아 수업 여건은 괜찮았지만 이 기간 중 연구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한다. 가난한 정부는 재정난을 이유로 대구의학전문학교와의 통합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1940~1950년대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 와중에 1952년에는 피부과 강의원 교수가 미국 타코마 병원으로 해외 연수를 간 것을 시작으로 교수 연수 계획이 시작되어 1회·2회 졸업생들이 1950~1960년대에 해외 연수 후 교수가 되어 연구를 했다. 1953년에는 의과대학 1회 졸업생들이자, 전남대학교의 1회 졸업생들을 배출해냈다. 1961년에는 본교 의대 박사 3명을 배출해냈다[* 당시 의학 박사를 배출해낼 수 있는 학교는 서울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연세대 정도밖에 없었다]. 한편, [[5.16 군사쿠데타]]가 터져 교수들이 군대로 소집되어 다시 연구 활동이 위축되었으나 이내 재개되어 활기를 되찾았다. 1964년에는 교수들의 자비(自費)로 의대 잡지를 발간했다. 활발하던 연구는 1974년 대학원생 수료자만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제도가 변경되면서 연구생이 줄어들어 연구비 조달이 줄어드는 바람에 쇠퇴했다. 그러나 연구 장학금을 모아 해외 연수를 지원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하면서 극복해냈다. 1988년에는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에 이어 세 번째로 영문 학술지를 발간하게 되었다. 1970년대~1980년대는 차관으로 기자재들을 도입해 이전보다 연구 수준이 향상되었다. 국립 의대이면서 긴 역사와 좋은 교수진을 보유해 인기가 높았으며, 현재도 거점국립의대로 선호도가 높다. == 부속병원 == * [[전남대학교병원]] * [[화순전남대학교병원]] == 학과 == === 의예과 === === 의학과 === [[분류:전남대학교]][[분류:의과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