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7a0><tablewidth=45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장홍염}}}'''[br]'''張洪琰'''}}}}}} || ||<-2> [[파일:external/rokps.or.kr/173.jpg|width=100%]]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장석산(張石山) || || '''자 / 호''' ||충직(忠直) / 석포(石圃) || || '''본관''' ||[[인동 장씨]][* 상장군 금용(金用)계 함평파 23세 홍(洪) 항렬. 인동 장씨 28세.[[http://blog.daum.net/jangho8888/1150|#]]] || ||<|2> '''출생''' ||[[1910년]] [[12월 24일]][* 인동장씨대동보 5권 (함평파)에는 11월 2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 ||[[전라남도]] 지도군 [[장산면]] 대리[br](현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대리)[*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http://www.shinan.go.kr/home/www/about/village_info/village_info_11/village_info_11_09/page.wscms|#]] 출생지인 88번지에 장홍염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 ||<|2> '''사망''' ||[[1990년]] [[11월 5일]] ||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서울중앙병원]]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tablealign=center> [[파일:external/www.honam.co.kr/20495909.jpg]] || || 2016년 6월 17일, 고향 장산도에서 치러진 흉상 제막식 || [[대한민국]]의 전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장병준]]은 그의 맏형이다. == 생애 == 1910년 전라남도 지도군 장산면(현 신안군 장산면) 대리에서 정6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아버지 장진섭(張鎭燮)과 어머니 [[하동 정씨]] 정치순(鄭致順)의 딸 사이의 네 아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인동 장씨]] 함평파 22대손이며 장산도 대리마을 입향조로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낸 장인걸(張仁傑)의 6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조부 장도규(張道奎) 대에 이미 장산도 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지주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숙부 장진방(張鎭邦)이 주변 섬들의 간척사업을 주도하면서 일가는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그의 아버지 장진섭은 조부의 셋째 아들이었던 탓에 그리 많은 토지를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평소 신학문에 관심이 많아 네 아들들을 [[목포시|목포]]와 [[경성부|경성]], [[일본]]까지 유학을 보내어 새로운 근대학문을 익히게 했다. 이에 그 또한 상경하여 [[경성부]] [[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이던 1928년 11월 9일, 그는 사숙(社塾) 고학당(苦學堂) 교사 이종률(李鍾律)이 초고를 쓴, 당시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격문을 휘문고등보통학교 내의 여러 학생들을 대상으로 약 40장을 배포하기도 했으며, 또한 이듬해인 1929년 11월 3일, 5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각 학교 대표들과 함께 회합하여 1930년 1월 15일 9시를 기해 궐기할 것을 결의하고 항쟁하다가 결국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했다. 퇴학당한 후 같은 해 3월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은신하였으며, 1932년 9월 결국 [[베이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구금되었던 그는 1932년 12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베이징대학]] 경제과에 진학했지만 4학년 때 중퇴하였고, 이후 귀국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한국 광복군]] 전남지구대 [[참모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한국민주당]]에 속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무안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 정치를 막으려 노력하였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3250032920102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3-25&officeId=00032&pageNo=1&printNo=2466&publishType=00020|정계 은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다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동대문구 을|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55년)|민주당]] [[이영준(1896)|이영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전라남도 무안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당 [[유옥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가 1967년 탈당하였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으며, 1990년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해 있던 중 증상이 낫지 않아 결국 그 해 11월 5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에서 별세하였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110600239121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0-11-06&officeId=00023&pageNo=21&printNo=21448&publishType=00010|#]]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가계 == [[파일:external/magazine.hankyung.com/d519aa41452f263647fa25a47551a31a.jpg]] 집안이 호남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다. 특히 방계 쪽이 유명한데, 방계 자손으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인 [[장하성]][* [[나쁜 사마리아인들]], [[사다리 걷어차기]] 등의 저자로도 유명하다.]과 장하석 등과 [[장하성]] 전 정책실장 등 짱짱하기 그지 없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 광복군/군인]][[분류:제헌 국회의원]][[분류:제2대 국회의원]][[분류:한국민주당 국회의원]][[분류:민주국민당 국회의원]][[분류:인동 장씨]][[분류:신안군 출신 인물]][[분류:1910년 출생]][[분류:199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