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합천군 출신 인물]][[분류:1897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 성명 ||<(> 장인환(張仁煥) || || 생몰 ||<(> [[1897년]] [[10월 25일]] ~ [[1950년]] [[7월 5일]] || || [[출생지]] ||<(>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중리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장인환은 1897년 10월 25일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도쿄로 유학갔고, 1919년 2월 23일 도쿄 유학생인 최승만(崔承萬)·변희용(卞熙瑢) 등 12명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민족대회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대회 소집에 관한 취지문을 인쇄하여 24일 일본 일비곡(日比谷) 공원에서 취쥐문을 배포하며 거사를 계획했다가 경찰에 일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귀향한 그는 그해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아예비교생(東亞豫備校生) 이용노(李龍魯)로 하여금 자금을 조달하도록 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재일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집행위원으로 피선되어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으며, 1922년 9월에는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의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배일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26년에는 [[조선일보]] 대구지국을 맡아 [[신간회]]를 지원했다. 1931년 6월 11일 조선일보 대구지국장 겸 특파원으로 재직시 일본경찰의 발검사건(拔劍事件)보도로 체포되었고 그해 7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에도 구상업학교(大邱商業學校)의 동맹휴학을 유도하기도 했으며 [[8.15 광복]] 때까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필봉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했다가 여러 번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서울에서 말년을 보내다 1950년 7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장인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