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장익환(張益煥) || || 자 ||수겸(受謙) || || 호 ||중재(中齋) || || [[본관]] ||[[인동 장씨]] || || 생몰 ||[[1866년]] ~ [[1937년]] [[12월 10일]] || || [[출생지]]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면 상진리 || || 사망지 ||[[충청북도]] [[단양군]]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장익환은 1866년경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면 상진리에서 [[장충식(독립운동가)|장충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근원(李根元)의 문인으로, 1896년 3월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에게 가담하여 단양파수(丹陽把守)로 임명되어 군사와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충주성 방어 작전에도 참여했지만 충주성이 함락되는 걸 막지 못했다. 이후 장기렴의 관군이 추격해오자, 유인석은 단양을 방어하기 위한 의진을 구성했다. 이때 장익환은 중군을 맡았다. 하지만 유인석이 의병대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할 때 따라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그는 충청북도 제천군에서 [[원용팔]] 의병장의 휘하로 들어가 좌군장을 맡았고, 제천, 단양, 영춘, 청풍 등지에서 300 내지 400명 가량의 동지를 모집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원용팔이 체포되면서 의병대가 와해되자 정운경(鄭雲慶)에게 가담했고, 그 역시 체포되자 고향으로 피신해 한동안 시세를 살펴보다가 1907년 7월 [[이강년]] 의병장이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즉시 합류했지만 이강년이 까치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면서 실패했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지만 이마저 실패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단양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7년 12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장익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단양군 출신 인물]] [[분류:1866년 출생]][[분류:1937년 사망]] [[분류:건국훈장 애족장]]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장익환(독립운동가), versio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