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yonhapnews_28331174.jpg|width=150]] 張基旭 1943년 11월 02일 ~ 2012년 07월 02일 '''역대 고등고시 최연소 합격자.'''[* 심지어 사법 행정 '''둘 다!''']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정치인]]이다. 1943년 [[충청남도]] 서산군(현 [[서산시]])에서 태어났다. 7세에 [[국민학교]] 3학년으로 월반하였고 공주중학교 2학년 때에는 전국중학생학술경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검정고시|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를 수석으로 통과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지원, 1,617명의 지원자 중 6등의 성적으로 합격하여 신문에 이름이 났다. 1957년 서울법대 입학 당시 만13세 4개월([[세는나이]]로 15세).[* 다만 이 시대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은 등의 이유로 호적 신고를 수년씩 늦게 하는 것이 관행이었음을 고려하여야 한다. 실제로 1982년에 만14세로 서울대 최연소 입학한 학생이 있었는데 호적이 2년 늦게 등재된 경우라고 한다. 이 신문기사에서 장기욱도 호적이 늦게 등재된 케이스로 같이 언급되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13000209209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1-30&officeId=00020&pageNo=9&printNo=18561&publishType=00020#|#]] ] 1961년 서울대 법대를 수석[* 단과대 수석으로 총장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당시 전체 수석한테는 대통령상이 수여되었다.]으로 졸업하면서 같은 해에 [[고등고시]](제13회) 행정과, 사법과 양과에 최연소로 합격하여 만19세에 [[판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법무부]] 법무관을 거쳐 [[검사(법조인)|검사]]로 근무하다가[* 세는나이로 겨우 21세에 임관하였다(!). [[이시윤]]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이 대학교 4학년 때 '14살짜리가 서울법대에 6등으로 합격하였다'는 공고가 붙은 것을 보고서 눈을 의심하였다고(...)(민사소송법입문, 제2개정판, 98면). 검사가 된 경위도 황당한데, 원래 판사를 지원하여 임명되었으나 [[미성년자]](2013년 6월 30일 이전에는 만 20세가 되어야 성년이 되었다)를 임관시키기 곤란하다고 대법원에서 주저하자 검찰 쪽으로 전직한 것이라고 한다.][* 그 우병우가 '''23세에 검사가 되었다'''.], 1980년 검사를 사임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에 각각 충청남도 서산군-[[당진시|당진군]] 선거구로 공천 신청을 하였으나 탈락하였다. 그리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김현욱(정치인)|김현욱]] 후보와 민주한국당 [[한영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김현욱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입하였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다시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면서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해 [[박찬종]], [[이철]], [[홍사덕]], [[조순형]], [[허경구]] 등과 같이 노력하였다. 후보단일화가 실패하자 1988년 평화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그리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황병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당(1990년)|꼬마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91년)|민주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4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보건사회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따라가지 않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후신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김중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에 흡수되어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충청남도 서산시-[[태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문석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3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해 7월 5년 전 행정소송 의뢰인의 보상금을 횡령, 유용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를 당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여 정계를 떠난 뒤에도 [[12·12 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법률 지원 활동, [[삼성 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태안 유조선 원유 유출 사고]]에 대한 대책 마련을 벌이는 등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2012년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분류:법조인 출신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서산시 출신 인물]][[분류:제12대 국회의원]][[분류:제14대 국회의원]][[분류:민주한국당 국회의원]][[분류:신한민주당 국회의원]][[분류:통일민주당 국회의원]][[분류:평화민주당 국회의원]][[분류:무소속 국회의원]][[분류:민주당(1991년) 국회의원]][[분류:통합민주당(1995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