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3764><tablebgcolor=#003764> {{{#ffffff '''역임한 직위'''}}} || ||<bgcolor=#ffffff,#19191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제3공화국))] [include(틀:조선일보의 역대 사장)] ||<-5><tablewidth=100%><tablebordercolor=#580009><tablebgcolor=#ffffff,#1f2023><bgcolor=#580009> [[대한민국 국회|[[파일:국회휘장(9대-19대).png|width=30]]]] {{{#cfa547 '''[[대한민국 국회의원|{{{#cfa547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특별시|{{{#cfa547 서울특별시 }}}]] [[종로구|{{{#cfa547 종로구}}}]]·[[중구(서울)|{{{#cfa547 중구}}}]])'''}}} || ||<width=30%> 제8대 [[권중돈]](종로구) ||<|2> {{{+1 →}}} ||<|2><bgcolor=#ffffa1><width=30%> 종로구 - 중구 통합 [br] 제9대 [br] ''' 장기영 ''' ||<|2> {{{+1 →}}} ||<|2><width=30%> 제10대 [[민관식]] || || 제8대 [[정일형]](중구) ||}}} || ||<-2><tablewidth=400><tablebordercolor=#62bd48><tablebgcolor=#fff,#1f2023><tablealign=right> {{{#62bd48 {{{+1 '''장기영'''}}}[br] '''張基榮'''}}}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yonhapnews_28442172.jpg|width=150]]}}} || ||<bgcolor=#62bd48> {{{#ffffff '''출생'''}}} ||[[1916년]] [[5월 2일]] || ||<bgcolor=#62bd48> {{{#ffffff '''사망'''}}} ||[[1977년]] [[4월 11일]] (향년 60세) || ||<bgcolor=#62bd48> {{{#ffffff '''학력'''}}} ||선린상업학교{{{-2 (졸업)}}} || ||<bgcolor=#62bd48> {{{#ffffff '''경력'''}}} ||[[한국은행]] 부총재[br][[조선일보]] 사장[br][[코리아타임스]] 사장[br][[한국일보]] 창간, 사장[br][[서울경제신문]] 창간, 사장[br]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br][[IOC]]위원[br][[일간스포츠]] 창간, 사장[br] 제9대 국회의원 || ||<bgcolor=#62bd48> {{{#ffffff '''서훈'''}}} ||수교훈장 광화장[br]국민훈장 무궁화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언론인]], 체육인, 금융인, [[정치인]], 관료. 호는 백상(百想). == 일생 == 1916년 [[경성부]] 용산(現 [[용산구]])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1934년에 [[선린인터넷고등학교|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은행]]에 은행원으로 취직해 1948년에 조사부장, 1950년에는 [[한국은행]] 부총재까지 지냈다. 이후 1952년에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다. 1954년 4월에는 [[김활란]]으로부터 [[코리아타임스]]를 인수했고 같은 달에 임원규로부터 태양신문(1949년 창간)을 인수했다. 1954년 6월 9일부터 태양신문을 [[한국일보]]로 바꾸어 창간했다. 그는 한국일보 사장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1954년에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기자]] 공채를 시행했고, 1958년에는 국내 신문 최초로 과학부를 신설해 한국일보의 기반을 다졌다. 최초의 스포츠 전문지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여 사장을 겸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HLKZ-TV]]를 인수해서 한국 최초로 신방겸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기영이 인수한 지 2년만에 화재사건으로 폐업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이나 컨텐츠를 보는 안목이 좋고 추진력도 강했다. 인재 욕심이 많아서 글빨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든 기자로 데려오려고 했고, 당시 무명이었던 [[황석영]]을 발굴하여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게 한 것도 장기영이었다. 그리고 [[고우영]]을 메이저급 만화가로 만든 일등공신이었으며 1970년대 초반 전반적으로 [[만화]]를 하대하는 풍토가 있었음에도 만화사업에 관심이 있었는지 직접 뛰어들기도 했다.[* 이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고우영은 1990년대 중후반에 한국일보 소속으로 잠깐 시사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1964년에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입각하면서 신문사 경영에 소홀해졌고 이틈에 [[중앙일보]]가 기자와 광고국 직원을 대량으로 빼가버려서 [[한국일보]]가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65년 중앙일보 창간 당시 기자와 직원 대부분이 한국일보에서 빼온 인원이었다고 한다.] 그의 장관 재임 기간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고[* 박정희 정부 초기의 경제건설 5개년 계획은 경공업 중심으로 전임 장면 내각에서 마련한 것을 실천하는 성격에 가까웠다. 박정희 정부가 경제건설에서 본격적으로 독자성을 발휘한 것은 1960년대 후반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건설을 필두로 한 중화학공업 육성부터다.] 한국은 경제개발 단계에 진입하였다. 이 점에서 장기영은 후임인 [[김학렬]], [[남덕우]]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경제건설기를 대표하는 경제관료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에게 시련이 다가왔으니.. 1966년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인해 일어난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때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이 뿌린 똥물을 맞는(...) 봉변을 당했고 얼마 안되어 경제부총리 직을 떠나야 했다. 그 뒤 1967년에 한국일보로 복귀했다. 이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아시아경기연맹(AOC) 종신 명예위원장,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서울)|중구]]] 등으로 활동하다가 1977년 심장마비로 타계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 언론사에 한 획을 그은 가장 혁신적인 인물로 꼽힌다. 한국 최초로 상업 신문 시대를 열고 각종 참신한 시도들을 하며 [[한국일보]]의 방향을 잡고 신문 제작을 주도적으로 진두지휘했다. 욕도 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언론사에 대해서 잘 알고 능력도 뛰어났고 직원들과 소통도 잘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일보에서 장기영과 함께 일했던 기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http://www.fair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455|#]]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05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5012093998158|#]] 한국일보는 1973년부터 첫째 아들인 [[장강재]]가 사장직을 물려받아 운영했으나 1993년 8월에 간암으로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같은 해 11월에 장기영의 둘째 아들이자 장강재 회장의 동생인 [[장재구]] 회장이 물려받았다가 경영을 말아먹고 2013년에는 편집국을 폐쇄하는 등의 막장 행각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 후 한국일보는 2015년에 동화그룹에 인수돼 장기영 일가는 경영권을 완전히 잃게 됐다. 2010년대부터는 조중동은 물론이고 심지어 한겨레에게도 밀려 안습한 위치가 됐지만 사실 한국일보는 1990년대까지는 메이저급 신문이었다. 메이저급 정도가 아니라 장기영이 타계하기 전 1970년대의 한국일보는 [[동아일보]]와 함께 한국의 양대 일간지에 가까웠고, 그 밑에 조선, 중앙, 경향, 서울 등의 메이저가 포진하고 있었다. 장기영은 스스로를 '장 기자'라고 자칭하며 정부의 감투를 쓰고 있던 시절에도 자신의 본업이던 언론에 대하여 애정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이만섭]], [[최창봉]] 등 그 시절 원로 언론인들의 회고에 장기영의 당시 행적이 많이 드러나는 편이다. == 기타 == * [[종교]]는 [[불교]]를 믿었다. 소설가 [[김동리]]의 회고담에서 등장한다. [[http://www.paeksang.or.kr/psjang/psjang3View.asp?PageCode=paeksang&ci=97|#]] * 당시로서는 무명이던 [[황석영]]을 발굴하여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게 하고 엄청나게 밀어줬다. [[황석영]]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1974년에 처음 장길산을 연재할 당시 자료 조사비로 장기영이 거금을 덥석 내줬는데 어쩌다 보니 소문 듣고 몰려든 배고픈 주변 문인들 술 사주고 밥 사주고 하느라 돈을 그만 보름만에 다 써버렸다. 다시 장기영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번에는 자료비로 꼭 써라. 안 그러면 다음은 없다"면서 처음보다는 적게 자료비를 내주고 자주 가는 술집 명함에 장기영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앞으로는 술이 마시고 싶으면 여기서 내 이름 앞으로 달아놓고 마셔라. 단 자료비로는 술 마시지 마라"라고 했다고 한다.[* 출처: [[http://www.paeksang.or.kr/psjang/psjang3View.asp?PageCode=paeksang&ci=8|백상재단 홈페이지]]] * [[일간스포츠]]에서 주최하는 국내유일의 종합예술상인 '[[백상예술대상]]', 재단법인 백상재단, 서울경제 백상경제연구원은 그의 호에서 유래했다. == 가계도 == * 장동후 / 妻 이성녀 * 1남 장기영 전 한국일보 사장 및 경제부총리 ,,(1916 ~ 1977),, / 妻 이문자 ,,(1920 ~ 2004),, * 1녀 장일희 전 백상기념관장 ,,(1943 ~ ),, / 夫 현순구 전 한길사료 회장 ,,(1941 ~ ),, * 1남 현상엽 전 한국일보 기자 ,,(1970 ~ ),, * 1남 [[장강재]] 전 한국일보 회장 ,,(1945 ~ 1993),, / 妻 [[문희]] 영화배우 ,,(1947 ~ ),, * 1녀 장서정 ,,(1972 ~ ),, * 1남 장중호 전 일간스포츠 회장 ,,(1973 ~ ),, * 2남 장서호 ,,(1980 ~ ),, * 2녀 장서현 ,,(1991 ~ ),, * 2남 [[장재구]] 전 한국일보 회장 ,,(1947 ~ ),, * 3남 장재민 미주한국일보 및 서울경제신문 회장 ,,(1949 ~ ),, * 4남 장재국 소년한국일보 회장 ,,(1952 ~ ),, * 5남 장재근 전 한국일보 부회장 ,,(1954 ~ ),, == 관련 자료 == * [[http://www.paeksang.or.kr/psjang/psjang1.asp|백상재단 백상 장기영 프로필.]] == 대중매체에서 ==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에서 [[배우]] [[백일섭]]이 장기영 역을 연기하였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장기영, version=63)] [[분류: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분류:상장군계 인동 장씨]][[분류:용산구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1916년 출생]][[분류:1977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박정희 정부/인사]][[분류:제9대 국회의원]][[분류:민주공화당 국회의원]][[분류:국민훈장 무궁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