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혁명 프랑스의 정치인]] [[분류:1757년 출생]] [[분류:1794년 사망]] [[분류:노르망디 출신 인물]][[분류:참수된 인물]][[분류:프랑스의 진보주의자]][[분류:급진적 자유주의자]][[분류:공화주의자]] [[파일:Jacques_René_Hébert.jpg|width=300]] Jacques René Hébert 1757.09.20 ~ 1794.03.24 [목차] == 개요 == [[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적 공화주의를 표방한 [[클뢰브 데 자코뱅]]에서도 가장 강경파였던 인물. 자코뱅 집권 당시 [[상퀼로트]]의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자코뱅 내의 온건파와 대립했으나 결국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숙청당했다. == 일생 == 자크 르네 에베르는 1757년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꽤나 곤궁하고 불우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년 시절에는 [[보헤미안]]적인 삶에 푹 빠지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에 열광하여 성직자와 귀족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790년 11월에는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어 <르 페르 뒤셴>이라는 신문을 발행했는데, 대중적인 언어로 기득권을 향한 신랄하고도 날카로운 풍자로 인기를 끌었다. 이후 [[클뢰브 데 자코뱅]]에 발을 들여 '[[클뢰브 데 코르들리에]]'라는 공화파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열성적인 활동을 펼쳤다. 에베르는 자코뱅 내에서도 매우 급진적인 성향을 띠었다. 그는 왕족, 귀족, 성직자 등을 포함한 기득권층과 반혁명 세력을 증오했으며, [[반기독교]]적인 말과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지롱드당]], [[푀양파]], 자코뱅 내의 온건파들과 늘 충돌했다. 하지만 기득권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던 파리 민중, 특히 [[상퀼로트]]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 [[파리 코뮌]]에서 주도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반혁명 세력을 격렬하게 성토하는 에베르의 [[프로파간다]]는 혁명의 열성분자인 상퀼로트에게는 [[사이다(유행어)|사이다]]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자코뱅 내에서는 에베르를 지지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을 '에베르파'라고 불렀다. 에베르파의 주요 구성원과 지지층은 상퀼로트였다.] 혁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792년 8월 10일 봉기]], [[9월 대학살]], [[1793년 5월 31일 봉기]]([[지롱드당]]에 대한 공격)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관여하며 자코뱅의 집권을 도왔다. 자코뱅 집권 후에는 온갖 과격한 정책들을 주장하며 [[조르주 당통]],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형을 주도한 것도 에베르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과격한 행보는 다른 자코뱅 내 파벌들의 우려를 가져왔다. 조르주 당통은 에베르가 너무나 과격하다고 비판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이신론]]자였기에 에베르의 [[무신론]]을 비판했다.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를 '초혁명적인 인물'로 규정하고 그와 가까이 하기를 꺼려했다. 에베르도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를 향해 '온화주의자'라며 그들의 혁명성이 부족하다고 깠다. 이러한 대립으로 말미암아 에베르는 1794년 파리 민중의 배고픔을 이용해 [[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짰다. 하지만 이는 다른 파벌들에게 알려졌고, 에베르는 그를 따르는 상퀼로트들과 함께 체포된다. 결국 그는 1794년 3월 24일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에베르의 처형으로 인해 그를 지지하던 상퀼로트들은 로베스피에르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이는 [[테르미도르 반동]]에서 로베스피에르파가 몰락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