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파이널 판타지 14의 인스턴스 던전, rd1=시스이 궁)] [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table width=700>[[파일:2017-10-09 15-07-36.jpg|width=100%]]|| || 현재 자수궁 터 || [목차] == 개요 == 慈壽宮.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 68[* 구 [[지번주소]] [[종로구]] 옥인동 45-1.]일대에 있던 [[조선]]의 [[궁|별궁]].[*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는 [[윤덕영]]의 벽수산장과 [[이완용]] 집 터 사이다.(...)] 지금은 없다. == 역사 == 원래 [[무안대군]] [[이방번]]이 살던 집 터였다. 그러다가 [[문종(조선)|문종]]이 옛 무안대군 집을 수리하고 [[세종(조선)|세종]]의 [[후궁]]을 옮겨 살게 했다. 이후 선대왕들의 후궁들이 모여 살았으며 [[성종(조선)|성종]] 때 [[세조(조선)|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가 머물면서 잠시 이름을 창수궁(昌壽宮)으로 바꾸었다. 이 외에도 [[폐비 윤씨]]와 [[단경왕후]]도 폐출된 후 한동안 머물렀으며 [[인종(조선)|인종]]의 후궁 정씨[* 송강 [[정철]]의 [[누나]].]도 살았다. [[후궁]]들은 당연히 [[재혼]]을 할 수 없었고[* [[사대부]]가의 [[부인]]들도 [[재혼]]하면 엄청난 [[사회|사회적]]인 [[비난]]에 시달렸는데 하물며 [[후궁]]들이야...], 자수궁에 들어온 후궁들 중에는 [[머리]]를 깎고 [[출가]]하거나 또는 [[비구니]]와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보우|불교가 잠시]] [[문정왕후|권력 층과 가깝던]] [[명종(조선)|명종]] 때에는 이 곳에 종각과 나한전을 지어주었다. 나한전은 [[절(불교)|절]]에서 아라한과[* 아라한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를 얻은 [[성자]]를 봉안하는 곳이다. 그래서, 아무리 비구니들이 같이 산다해도 엄연히 왕실 사람이 머무는 곳에 [[불교]] [[건물]]이 생긴다며 신하들이 반발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궁궐]] [[공사]]에 병적이었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인왕산]]의 왕기(王氣)를 누른다는 명분으로 [[인경궁]], [[경희궁|경덕궁]][* 훗날 [[경희궁]]으로 개칭.] 등과 함께 옛 자수궁 일대에 큰 [[궁궐]]을 짓고 이름도 그대로 자수궁이라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은 사용하지도 못한채 쫓겨났고(...) 자수궁의 궁 지위를 박탈한 뒤 '자수원(慈壽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아예 이원(尼院), 즉 [[비구니]]들을 위한 전용 공간으로 활용하였으며 많을 때는 최대 5,000여명의 비구니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명나라]] [[황실]]의 [[궁녀]]였던 굴씨(屈氏)도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함께 들어와 이 곳에 머물렀다. == 마지막 == ||<table width=700>[[파일:성균관 비천당.png|width=100%]]|| || 옛 자수궁 자재로 세운 [[성균관]] 비천당. 단 지금 건물은 [[6.25]] 때 불탄 것을 1988년에 [[복원]]한 것이다. || 그러나 [[비구니]]들의 폐단이 심하다고 하여[* [[비구니]]들이 잘못을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사대부]]들 입장에서 [[한양도성|도성]] 한복판에 큰 [[절(불교)|절]]이 있고 비구니 수천 명이 머무른다는 것 자체를 엄청난 [[낭비]] 및 폐단으로 생각한 것이다.] 부제학 유계의 상소를 계기로 1661년([[현종(조선)|현종]] 2년) 자수원을 폐지하여 없앴고 [[어린이]]들은 [[환속]]시켰으며 [[노인]]들은 [[한성부|성]] 밖으로 옮겼다.[* 선왕의 후궁들이 살던 곳이라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으나, 폐지 논의 당시 남은 후궁들이 별로 없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 자리에 [[한양도성|도성]] 내 5학 중 하나인 북학(北學)을 세웠으며 1663년(현종 4년)에는 자수원 건물의 자재로 [[성균관]] 서쪽에 비천당(丕闡堂)과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를 세웠다. == 기타 == ||<table width=700>[[파일:IE001983875_STD.jpg|width=100%]]||[[파일:자교교회.jpg|width=100%]]|| || 《경성부사》에 실린 자수궁교 || 자교교회 || * [[경복궁]]에서 자수궁 가는 길에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사이에 있던 백운동천(白雲洞川)에 '자수궁교(慈壽宮橋)'라는 [[다리(건축물)|돌다리]]를 세웠다. [[일제강점기]]까지 남아있었으며 1927년 백운동천에 암거 공사를 진행하며 없어졌다. 줄여서 '자수교(慈壽橋)', '자교(慈橋)'라고도 불렸으며 그래서 근처 [[교회]] 이름도 이 다리에서 따와 '자교교회'가 되었다.[* 다만 한자는 '紫橋'다.]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건축]][[분류:궁전]][[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