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48D1CC>'''[[은전군|{{{#FAFAD2 은전궁의 역대 종주}}}]]''' || ||<width=30%><:> 3대[br][[완평군|완평군 이승응]] ||<:> {{{+1 ←}}} ||||<width=30%><#48D1CC><:>'''--{{{#FAFAD2 인양군 이재근[* 원래 완평군의 장남인 그가 차기 은전궁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 완평군보다 일찍 죽어 그의 장남 이헌용이 물려받았다.]}}}--''' || {{{+1 →}}} ||<width=30%><:> 4대[br]이헌용 || ||<-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29176e><tablebgcolor=#29176e> {{{#ffd800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br] {{{+1 '''仁陽君[br]인양군'''}}}}}} || ||<width=20%> '''{{{#ffd800 군호}}}''' ||<-2><bgcolor=#fff>인양군(仁陽君) || || '''{{{#ffd800 이름}}}''' ||<-2><bgcolor=#fff>이재관(李載寬) → 이재근(李載覲) || || '''{{{#ffd800 자}}}''' ||<-2><bgcolor=#fff>윤선(允善) || || '''{{{#ffd800 출생}}}''' ||<-2><bgcolor=#fff>[[1857년]] [[9월 21일]] || || '''{{{#ffd800 사망}}}''' ||<-2><bgcolor=#fff>[[1896년]] [[12월 6일]] (향년 39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사도세자|장조]]의 서3남 [[은전군]]의 양증손자이자 [[완평군]]의 큰아들이다. == 생애 == 1857년([[철종(조선)|철종]] 8년) 9월 21일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인 유학 [[완평군|이신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 중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이 근 2 ~ 300년 전 임금이었던 11대조 선조였기에, 태어날 당시 그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만 3세 되던 1860년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의 양손자이자 [[풍계군]]의 양자였던 [[이인응|경평군 이호]][* 이세보로 더 잘 알려져있다. 원래는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후손이다.]가 파양당하고 아버지 이신덕이 대신 [[입양]]가면서 그 역시 [[왕실]]의 일원이 된다. 이밖의 어린 시절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878년(고종 15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특명으로 군관에 임명되었고 그 해 [[철종(조선)|철종]]비 [[철인왕후]]의 장례 시 빈전도감에 낭청으로 참여한 공로로 어린 말 1필을 받았다. 이듬해인 1879년(고종 16년) 3월 고종의 명으로 이름을 이재근으로 고쳤다. 이후 음서로 출사하여 부사용(副司勇)[*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종9품 무관직.]과 사용(司勇)[*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둔 정9품 무관직.]을 지내는 등 주요 군직을 맡았고 1880년(고종 17년) 혼전의 종척 집사(宗戚執事)[* 조선시대 국상(國喪) 때 왕실 친인척에게 시키는 임시 벼슬.]로 참여하였다. 1888년(고종 25년) 5월 고종이 친히 낸, 지금으로 치면 시 짓기 대회[* 응제(應制, 통상 '製'로 적지만 이는 일제의 잔재다.)라고 하는데 '어명으로 시를 짓는다'는 뜻이다.]에 합격하여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그래서 몇 달 뒤 식년시(式年試)[* 조선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 시험. 식년시에는 크게 소과, 문과, 무과가 있었다. 즉, 우리가 흔히 아는 과거 시험이라 보면 된다.]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그 해 11월 16일 영릉(永陵) 참봉[* [[세종(조선)|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효종(조선)|효종]]의 영릉(寧陵)이 아닌,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진종(효장세자)]]와 [[효순왕후|효순왕후(현빈)]] 조씨의 능이다.]을 역임하고 1889년(고종 26년) 8월에는 선공감감역, 1890년(고종 27년) 1월에는 금부도사를 지냈다. 이 때 몸이 안좋아져 2달 뒤 [[황희#s-2.4|사직한다 했으나 고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 뒤에 감역(監役)을 거쳐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중국으로 보내는 직물, 인삼과 의복 및 각종 비단과 물감 ‧ 염색 ‧ 직조 등의 일을 관장하는 제용감의 관리자.]와 수릉 능령(綏陵陵令)을 거쳤다. 그 무렵 아내 연일 정씨와 사별하고 해주 오씨와 재혼하였다. 1890년대 초중반엔 주로 지방으로 파견나가 고을의 수장을 많이 맡았다. 경기도 진위현령[*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일대.] 및 강원도 간성군수, 그리고 경기도 삭녕군수와 수원군 판관을 지냈다. 수원군 판관시절에도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였으나, 고종은 무시하고 오히려 그를 수원군수로 '''승진'''시켰다. --[[황희#s-2.4|윤허하지 아니하다]]-- --[[심영(야인시대)|이러다 내가 죽는다고요!]]--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명성황후 피살]] 이후 중앙으로 올라와 다시 종척집사를 맡고 이듬해인 1896년([[건양]] 원년) 3월에는 농상공부참서관(農商工部參書官)이 되었다. == 사망과 이후 == 농상공부참서관으로 재직하던 1896년(건양 원년) 12월 6일 지병으로 40세(만 39세)에 별세하였다. 시신은 [[경기도]] [[인천광역시|인천부]] 전반면[* 현재 [[경기도]] [[시흥시]] 북부 일대.] 묘좌(卯坐)에 안장되었다. 첫부인 연일 정씨의 묘는 경기도 [[과천시|과천군]] 남면 당정리[* 현재 경기도 [[군포시]] 당정동 일대]에 안장되었다. 생전에는 일반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1899년([[광무]] 3년) 족보 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종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황제의 4대 후손까지는 황족으로 대우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인양도정(仁陽都正)을 거쳐 4년 뒤 인양군(仁陽君)으로 최종 추봉되었다.[* 작호는 지금의 인천광역시인 [[인천|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에서 유래했다.][* 은언군계 : 증(贈)[* 작위 수여 당시 고인.] [[덕안군|덕안군 이재덕]], [[경은군|경은군 이재성]], [[청안군(1851)|청안군 이재순]]. [br] 은신군계 : 증(贈) [[완림군|완림군 이재원]], [[완순군|완순군 이재완]], 증(贈) [[완영군|완영군 이재긍]], [[흥친왕|완흥군 이재면]]. [br] 은전군계 : 증(贈) [[인양군|인양군 이재근]], [[의양군|의양군 이재각]], [[예양정|예양정 이재규]].] == 가족과 후손 == 첫 부인 연일 정씨와 두 번째 부인 해주 오씨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고 이름없는 첩 사이에서 아들 이헌용 하나만 낳았다. 첩실의 소생인 이헌용은 생가 숙부인 이재현[* 완평군 이승응의 둘째 아들인데 이승응의 생가(경창군가) 동생 이낙응의 양자로 출계했다. 그래서 장조 추존 당시에도 황족으로서의 군호는 받지 못했다.]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러나 인양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그런지 나중에 정실부인 해주 오씨가 이헌용을 자신의 친자로 입적시키고 기른다. 하지만 나중에 상당한 난봉꾼이 되는데 음주로 인한 사고는 기본이고, 돈 2백원으로 유부녀를 매수하여 첩으로 삼았다가 첩이 된 여성의 본 남편이 변호사를 사서 소송을 당한 적도 있었고(...)[* 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일자, 2면.] 뒷날 재산 문제로 적모 오씨 부인을 상대로 소송까지 걸다 오히려 패한 적도 있었다.(...) 이런 방탕한 생활 등으로 대부분의 재산을 잃게 된다. 이헌용은 1921년 사망하는데 아들이 없어 [[의친왕]]의 4남 이창(호적명 이해직, 아명 이창길)을 입양해 대를 이었다. 이창은 이광주, 이은주, 이일주, 이석주 등 네 아들을 낳아 현재까지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 [[분류:조선의 왕자군]] [[분류:대한제국의 황족]] [[분류:1857년 출생]] [[분류:189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