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조선 왕비)]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83103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조선 인목왕후 김씨 관련 틀'''}}}}}} || ||<bgcolor=#FFFFFF,#1F2023>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조선 왕대비)] ---- [include(틀:역대 조선 대왕대비)] ---- }}} || ||||<tablealign=right><:>'''[[호칭]]'''||<-5>'''인목왕후(仁穆王后)''' || ||||<:> '''[[시호]]''' ||||<(>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br](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正肅仁穆王后) ||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충정로|반송방 사저]][br](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역|충정로]] 근교) ||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인경궁]] 흠명전 || ||||<:>'''본관''' ||||<(> [[연안 김씨|연안]](延安) || ||||<:> '''부군''' ||||<(>[[선조(조선)|선조]](宣祖) || ||||<:> '''아버지''' ||||<(>연흥 부원군 [[김제남]] || ||||<:> '''어머니''' ||||<(>광산 부부인 노씨 || ||||<:> '''자녀''' ||||<(>[[정명공주]], [[영창대군]] 등 1남 1녀 || ||<|2><:> '''생몰'''[br]'''기간''' ||<:> '''음력''' ||<(> [[1584년]] [[11월 14일]] ~ [[1632년]] [[6월 28일]] || ||<:> '''양력''' ||<(> [[1584년]] [[12월 15일]] ~ [[1632년]] [[8월 13일]][br](향년 47세) || ||||<:> '''재위'''[br]'''기간''' ||<(> [[1602년]] ~ [[1608년]](왕비)[br][[1608년]] ~ [[1618년]](왕대비 재위 기간)[br][[1618년]] ~ [[1623년]]([[경운궁|서궁]] 유폐 시절)[br][[1623년]] ~ [[1624년]](인조반정으로 복위)[br][[1624년]] ~ [[1632년]](대왕 대비) || ||<table width=350> [[파일:attachment/uploadfile/1-duk004491-000-02.jpg|width=100%]] || || 보물 제1627호로 지정된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 소장.][br]인목왕후는 [[서예]]에 조예가 깊었으며, 딸 [[정명공주]]도 상당한 명필이었다고 전한다. || [목차] == 개요 == [[조선]] [[선조(조선)|선조]]의 첫 계비이자,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의 어머니. 연흥부원군 [[김제남]][* [[중종(조선)|중종]] 대 [[영의정]]을 지낸 김전의 증손자이며, 권신 [[김안로]]의 종손이다. 더 위의 조상 중에는 [[김자지|이름을 말하기 곤란한 분]]도 있다.]과 광산 부부인 광주 노씨의 [[차녀]]이다.[* 장녀는 심정세에게 시집가는데 심정세는 심강(청릉부원군, 명종비 인순왕후의 아버지)의 손자이다. 즉 인순왕후와 인목왕후는 서로를 본 적이 없지만 법적으로는 (조카)며느리이며 친가로도 연결이 된다.(친가쪽으로는 직접적인 호칭은 없겠지만 굳이 따진다면 사돈? 어차피 직접 만난 적이 없었기에 호칭문제는 별개다. 인척관계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광해군]]과 [[인조]] 때까지 생존해서인지 흔히 [[인목대비]]라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대비로서의 존호는 '''[[소성대비]](昭聖大妃)'''였다.[* 이전의 [[문정왕후]]도 대비 존호는 [[성렬대비]](成烈大妃)지만, 문정대비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인목왕후나 소성대비라 불러야 맞다. 참고로, 인목대비는 잘못된 표현이지만 워낙 많이 쓰이는 탓에 인목대비로 검색해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소성대비 역시 정식 명칭이기에 이 문서로 연결된다. == 생애 == === [[왕비]](새 중전) 간택 === 일단 법적 항렬상 [[광해군]]의 [[계모]]이긴 한데, 나이가 광해군보다 '''9살'''이나 한참 어렸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될 당시의 나이는 19세, 남편 선조는 51세였다. 보통 왕비 간택의 대상이 되는 나이는 13세~16세[* 당시의 [[세는나이]] 기준]였으며, 일반적인 반가 처녀들도 17세~18세에 미혼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척 늦은 나이였다. [[임진왜란]]의 혼란함 와중에 혼기를 놓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차피 [[하성군|선조]]가 재혼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이었던지라, 인목왕후의 나이가 많은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조는 이미 50이 넘은 나이였고,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는 선조 사이에서 후사를 보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적자(嫡子)'''를 보려면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바로 [[임신]]할 수 있는 나이의 처녀[* 당시에는 소녀들의 발육이 그리 빠르지 않아, 일반적인 [[왕비]] 간택 나이에 간택된 왕비들은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를 왕비감으로 간택했다는 견해도 있다.[* 인목왕후는 혼인한지 일년이 되기도 전에 첫 임신으로 [[1602년]] [[6월 27일]]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년]] [[11월 24일]] 둘째 왕녀(이름 미상, 요절), [[1606년]] [[3월 6일]] 적통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출산했다] 한편 [[하성군|선조]]와 인목왕후의 가례 당일 마른하늘에 폭우가 갑자기 쏟아져, 사람들이 새 왕비의 [[계축옥사|불행]]을 예측했다고도 한다. === 왕비 시절 ===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왕이 재혼하는 일 자체는 특별할 것 없는 관례였지만,[* 왕이야 승하하면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으면 그만이지만, [[내명부]] 수장인 [[왕비]]는 세상을 떠나면 이어받을 사람이 없으니 후궁들의 권력암투를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새로 들여야 했다.] 많은 여인들 중 인목왕후가 선택받은 데에는 선조의 의중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유생들이 자기들끼리 무리짓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잘 어울리지 않았던 무(無)당파적 인물인 데다, [[연안 김씨]] 가문 자체도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완전히 기울어 있어 지나치게 세도를 부릴 위험이 적었다. 또한 [[김제남]]의 사돈 심엄[* 심인겸(인순왕후의 친동생이자 동서분당의 시초인 심의겸의 형)의 아들, 심엄의 아들 심정세의 부인이 김제남의 장녀다.]이 [[정원군]]의 [[동서#s-2|동서]][* 정원군의 부인인 연주부부인(추존 인헌왕후) 구씨와 심엄의 부인이 자매다.]였고 [[광해군]]의 처남 류희발과 인척[* 류희발의 부인이 심엄의 고모다.][* 이렇게 되면 광해군과 인조 역시 실제로는 숙질간이었으며 광해군의 처가와 인조의 외가 쪽이 서로 엮여있었단 의미다.]이라, 기존 왕실 구성원들과도 큰 충돌 없이 잘 섞일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듯하다. 전체적으로 특별할 것 없는 [[왕비]]였다. 다만 사대부 영애로 나고 자라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터라, 세상물정을 너무 몰라서 처세에 약했다는 점은 있었다. [[하성군|선조]]의 총애를 반던 [[후궁]] [[인빈 김씨]]가 처음에는 자기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암암리에 움직이다가 결국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후엔 재빨리 광해군으로 갈아타 관계를 개선했던 것과는 달리[* 그 덕분인지 [[인빈 김씨]]는 광해군 즉위 후 괜찮은 대접을 받았고, 인빈 김씨의 자손들도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을 제외하고는 옥사에 휘말리지 않았다. 다만 정원군은 그 일로 상심해 죽었다.][* [[임진왜란]] 이전 세자 책봉이 유력했던 아들 [[신성군]]을 무반 명가 [[평산 신씨]]의 일원이자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 높았던 [[신립]]의 딸과 혼인시키고, [[정원군]] 역시 [[서인]] 명문가이자 평산 신씨와 쌍벽을 이룬 무반 명가 [[능성 구씨]] 집안과 혼인시켜 배경을 든든히 하고, [[정철]]을 쳐내려는 [[이산해]]와 연합하는 등, [[인빈 김씨]]는 자기 소생을 차기 왕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엔 자신의 외조카를 [[광해군]]의 [[후궁]]으로 들이고, [[하성군|선조]]와의 사이에서 광해군 편을 많이 들어주는 등, 광해군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그래서 의심 많은 광해군조차 "내가 지금 자리에 있게 된 데는 서모(庶母)의 공이 컸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로 사이가 원만해졌다.], 인목왕후는 처세술이 모자랐다. 때문에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선조(조선)|선조]]에게 "왕자를 세자(世子)로 부를 것인지, 아니면 대군(大君)으로 부를 것인지"를 물어보는 경솔한 짓을 했으며, 선조에게 부탁을 해서 무려 400여명에 이르는 [[궁녀]]들을 자신의 처소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로 만들었는데, 이 궁녀들 중에는 원래 광해군 처소에 있던 궁녀가 100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영창대군]]을 마치 세자처럼 차려입히는가 하면,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함께 치부에 힘을 써서 재물을 모으는 데 열중하여 눈총을 사기도 했고, 중궁전 소속 나인들이 동궁 소속 나인들을 핍박하거나 [[광해군]] 앞에서 방자하게 구는데도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특히 인목왕후의 나인들은 입궁한 지 얼마 안 된 인목왕후가 궁 내부 사정을 잘 모른다는 것을 이용하여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 정작 [[광해군]]이 임금이 되고 [[영창대군]]에 역모에 휩싸인 후에는 너도 나도 있지도 않은 거짓 고변을 하여 인목왕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또한 인목왕후 본인도 궁중의 법도를 어기고 [[영창대군]]을 세자처럼 입히는 등, 철없고 위험한 실책도 저질렀다. 여기에는 인목왕후의 경솔함 뿐 아니라 남편 [[선조(조선)|선조]] 탓도 있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선조의 위신은 크게 하락했다. 파천도 파천이었지만, 백성들을 버리고 요동(명나라)으로 망명할 계획을 추진하거나 시기심에 눈이 멀어 멀쩡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하여금 수군을 통채로 궤멸시키고 삼남[*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역을 통째로 내줄 뻔하는 등의 행위로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보다못한 [[류성룡]] 등의 신하들이 선위를 요구하려다 차마 말 못하고 물러가는, 다른 때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심지어 선조의 총신이었던 [[이항복]]과 [[이덕형]]의 경우에는, [[당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피해 피난 간 사이 분조를 이끌던 태자가 제위에 올라 [[당숙종]]이 된 고사를 거론하며 대놓고 선위를 주장하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먼저 선위 카드를 꺼내들어 선수를 치고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는 굴욕적일 정도로 [[명나라]]에 기대는 방법으로 어떻게든 권위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아들 [[광해군]]이 [[임진왜란]] 기간 동안 적극적인 분조 활동을 통해 선조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권위가 강해져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을 통해 [[북인|대북, 청소북]]은 물론 재야 유림까지 [[광해군]]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고 민심도 두루 사고 있었다. [[하성군|선조]]는 왕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 광해군을 어느 정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어리지만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과 어심을 읽은 줄 알고 부화뇌동하는 탁소북 유영경을 이용했다. === 대비 시절 === [[선조(조선)|선조]] 승하 시점에서도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20대 중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1608년|선조 40년]] 10월에 선조가 쓰러졌을 때 숨이 가빠지자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정 내에서 유일하게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탁소북 영수 [[유영경]]이 천부당 만부당하다며 반대하자, 당황한 인목왕후는 유영경과는 다른 처신을 하였다. >[[선조(조선)|성상]](聖上)께서 병중에 계신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심기 불편하심이 전보다 배나 더하오. 지금 성상의 전교(傳敎)를 따르지 않으면 환후(患後)가 더욱 위중(危重)해질까 염려되니 대신들은 전섭(傳攝)의 명을 따르도록 하오. 라고 [[언문]]으로 명을 적어내, [[광해군]]의 지위를 확실히 인정했다.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이 이복형 [[광해군]]의 정통성에 장애가 되었다는 주장은 사학계에서 진지하게 다뤄진 바 없으며, 2000년대 광해군 옹호 바람이 불면서 나온 인터넷발 설이다. 어차피 광해군은 탁소북을 제외한 전 당파와 재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광해군은 16년에 달하는 실무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분조를 이끈 경력의 소유자였다. 영창 대군보다 '''31살'''이나 많았고 종법해석상으로도 우위에 있었다. 결국 [[영창대군]]이 [[왕비]] 소생이란 점도, 광해군의 넘사벽 스펙 앞에선 결정적인 고려 대상이 못되었다. ==== '''[[계축옥사]]''' ==== 문제는 [[조선/왕사|조선 국왕]] 중에서 최다 [[친국|친국(고문)]] 기록을 가진 [[광해군]]의 [[편집증|편집증적인 의심병]]. 조작된 옥사에 크게 휘말려 친정아버지 [[김제남]]이 이유도 따지지도 못한채로 [[사약|사사]]당하고[* [[김제남]]이 치부를 일삼은 부패한 사람인 것은 사실인데, 이 정도로 죽어야 한다면 조선 왕조 500년 간 능지처참 당해야 할 왕실 구성원이 3자리 수는 가볍게 넘어갔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 부패의 끝판왕은 바로 [[광해군]]과 그 측근들이었다. 광해군 및 측근세력은 '''방납(傍納) 커넥션'''과 연계되어 일선 관리들이 기준치의 최대 100배에 달하는 방납가를 매기는 것을 비호했다.]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이 유배에 처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영창대군]]이 죽게 된 것(증살, 방에서 쪄죽음)은 뒤늦게 전해 듣는다.] 또한 자기 자신도 폐모론에 말려들었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이 특유의 '분위기 다 조성해 놓고 자기는 슬쩍 빠지는 방법'을 써서 폐모 교지는 내려지지 않았지만, 대비 자리에서 쫓겨나 서궁([[덕수궁|경운궁 석어당]])에 5년 동안 강제로 '''유폐(遺廢)'''되었다.[* 정확히는 인목왕후를 서궁으로 보내 유폐시킨것이 아니라 재건 된 창덕궁으로 왕실이 이어 한 것이다. 이 때 함께 머물던 인목왕후만 경운궁에 남기고 광해군 일가는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이후 경운궁을 서궁으로 격하시키고 감시병 정도만 둔 채 방치하였다.] ==== 폐모론 ==== 인목왕후의 입장에서 [[광해군]]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이 증오가 어느 정도였냐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후 반정 수뇌부들에게 "이혼(광해군의 이름) 부자(父子)의 머리를 가져오라. 그들의 살점을 뜯은 뒤에야 비로소 전교(傳敎)를 내리겠다."고 일갈할 정도였다.] 비록 인목왕후가 처신에 실수는 했지만 광해군을 밀어내려는 망상을 품진 않았고,[* 광해군 저주 건은 [[계축옥사]] 당시 고명 대신으로 끌려온 박동량이 살기 위해 한 증언이다. 이후 대비전의 상궁 나인들을 고문해 [[목릉]], 즉 [[하성군|선조]]의 능에 저주의 뜻을 담은 물건을 묻었다는 증언을 받아냈으나, 사실 확인을 위해 목릉을 파헤쳤을 때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 정황상 [[영창대군]]에 이어 인목왕후까지 끝장내려는 [[북인]]의 모함일 가능성이 높다.] 대놓고 부화뇌동하며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유영경]]과 달리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지원해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런데 광해군은 본인의 정통성이 탄탄해[* 세자로 16년, 게다가 그 사이에는 전시에 분조(分朝)를 성공적으로 이끈 경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문종(조선)|문종]]의 대리 청정 못지않은 플러스 요소다.] 별 위험도 되지 못하는 [[영창대군]]을 경계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오빠, 남동생들,[*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가장 어린 남동생 하나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아들 [[영창대군]]을 모두 죽였으며, 겉으로는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대비를 폐할 생각이 없었다 하면서 반대하는 이들은 귀양 보냈고, 강경책을 편 이들은 벌하지 않았고, 폐모론을 주장하는 대북에게 계속 힘을 실어주었다. 예를 들어 [[광해군]]이 인목왕후 폐비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참가한 인원이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명과 도성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었는데, 실록에조차 [[이이첨]]이 자파 세력을 동원해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이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또 신료들 대부분이 찬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 폐모론에 반대한 [[서인]], [[남인]] 원로 대신을 [[광해군]]이 다 쫓아내 대북 세력만 남은 상황에서 여론 조사를 했으니 당연히 찬성이 높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여론 조사는 그 당시 대북이 얼마나 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대북 독재 정권을 만들어 준 광해군이 이 사실을 몰랐을리가 없고, 왕인 광해군이 대놓고 대북을 비호하니 대북에 더 힘이 실리고 대북파들은 죽자살자 폐모론을 주장하니 인목왕후 입장에서는 배은망덕,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홍길동전]] 저자 '''[[허균]]'''이 인목왕후를 무척 [[증오]]해서 폐모론에 적극 앞장섰으며, 심지어 '''[[암살]] 기도'''까지 획책했던 것도 유명한 일화. 더욱이 [[허균]]은 "[[영창대군]]은 [[하성군|선조]]와 인목왕후의 아들이 아니라, 민가의 아이를 주워다 왕자로 꾸며낸 것"이라는 과감한 주장도 폈다. 이는 그의 교유 관계 때문이었는데, [[계축옥사]]의 시작이 된 칠서의 옥의 주인공인 박응서, 서양갑 등 [[서자]] 7명과 친밀한 사이였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목왕후를 밟아야 했다. ==== [[경운궁|서궁]] 유폐 ==== 이때 인목왕후의 딸이자 [[선조(조선)|선조]]의 유일한 적녀(嫡女)인 [[정명공주]]가 함께 유폐되었다. 정명공주가 [[옹주]]로 낮춰졌다는 기록은 없다. [[정명공주]] 참조.[* 당시 [[정명공주]]는 16세였고 이미 혼인하고 남을 나이였으나, [[광해군]]이 출궁을 허가하지 않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야 혼인할 수 있었다.] ==== [[인조반정|인조 반정]] ==== [[선조(조선)|선조]]와 [[인빈 김씨]]의 5남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군 서인과 힘을 규합하고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키며 서궁의 문이 열렸다. 사실 처음에는 반정군을 의심하여 "공주[* [[선조(조선)|선조]]와 인목왕후의 딸 [[정명공주]]. 당시 21살로 노처녀였으나 혼인하지 못하고, 인목왕후와 같이 서궁에 유폐당해 있었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이 [[정명공주]]마저 죽일까봐, 광해군에게 정명공주가 죽었다고 알렸다.]는 죽었다."며 반정군을 믿지 않았지만, [[능양군]]이 오자 그제야 믿었다. '''폐모살제'''로 [[북인]]을 제외한 [[서인]], [[남인]], 지방 사림의 지지를 상실한 '''[[광해군]]은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강제로 왕위에서 끌려나왔고 인목대비가 유폐된 [[덕수궁|경운궁 석어당]] 앞에 무릎꿇리고 인목대비의 폐위 교지를 받고 폐위되었다.'''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목왕후는 서인의 추대로 대왕대비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광해군의 처분에 대한 교지를 보면 광해군에 대한 인목왕후의 적개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인조실록]] [[인조]] 1년 4월 11일 경오 3번째 기사의 기록을 보면 "폐인(광해군)은 천지 사이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짓을 하여 하늘에 죄를 진 자이니, 대신과 조정은 '폐주(廢主)'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명령했다. 광해군을 폐주로도 취급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인목왕후는 [[인조]]를 만나보고는 그 전에 "이혼([[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가져오세요. 그 머리를 씹겠습니다. 그 '''살점'''을 씹고 전교를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서인]]은 쿠데타에 성공한 뒤 [[광해군]]을 한동안 궁에 가두고 남겼으나, 인목왕후는 처음엔 "광해군을 [[사약|사사]]시켜야 한다"고 윽박질렀고 이후 "2번 절하며 청한다"고 할 정도로 간절하게 먼 곳으로 광해군을 [[유배]]보낼 것을 요청했다. [[인조실록]] 첫페이지와 이를 참고로 기록한 [[승정원일기]]에서는 인목왕후의 발언이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머리를 가져오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가 친히 그들 부자의 목을 베겠다"'''고 더 과격하게 쓰여 있다. >不共戴天之讎, 忍之已久, '''願親斫渠父子之頭, 以祭亡靈'''。幽囚十餘年, 至今不死者, 蓋待今日耳, 願得甘心焉。 >“[[불구대천|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오. 참을 만큼 오래 참았으니, '''내가 친히 [[광해군|그]][[이지#s-7.1.2|들]] 부자의 목을 잘라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께 제사하고 싶소'''. 10여 년을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려서였소. 통쾌히 원수를 갚고 싶소.” >-<[[인조실록]]> 인조 1년 계해 (3월 13일) >-<[[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년) 3월 13일(계묘) ==== [[정명공주]]의 뒤늦은 혼인 ====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는 광해군 대에 혼사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서궁에 쥐죽은듯이 유폐되어 있다가 21살이 되어버렸는데, 당시 기준으로 아무리 왕의 딸이자 일국의 [[공주]]일지라도 21살이면 그냥 그 사실만으로 거의 혼삿길이 막히는 수준의 결격 사유이자 노처녀였다. 가뜩이나 늦은 혼사를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던 만큼, [[인조반정]] 사흘 만에[* 공신 책봉은 그렇다치고 반정 자체의 뒷수습도 안 끝난 시점이다. [[광해군]]이 [[유배]]조차 떠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부마]] 간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명공주]]가 당시 기준으로는 혼기를 지나도 한참 지난 노처녀였다 보니 나이가 비슷한 [[부마]]감들은 죄다 이미 결혼까지 했거나 최소한 약혼은 한 상태에서 집안 사정 상 혼례만 치르지 못했던 수준이고, 약혼조차 안 되었을 정도면 남자 쪽에서 정말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경우였다. 이미 결혼한 사람더러 무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주를 하자 있는 남자에게 시집보낼 수도 없으니, 약혼까지 한 사람들이라 해도 예외없이 부마 단자를 내도록 했고, 그 중 집안의 초상 문제로 혼인을 미루고 있던 [[홍주원]]의 약혼을 물려버린 다음 부마로 삼았다고 한다. 소성대비는 노처녀 딸이 겨우 얻은 [[홍주원|사위]]를 예뻐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위에게 오직 임금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까지 내려줬다가 비판받은 적도 있었다.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권 정통성을 세워주는 대의 명분인 소성대비를 우대하여 공주의 혼례를 호화롭게 치러주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해서 [[홍주원]]의 품계를 높여주거나 정명공주에게 땅이나 재산을 하사하는 등 후대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암태도 소작쟁의|소작 분쟁이 이어진 암태도]]도 이 당시 [[정명공주]]가 받은 땅의 일부로, 이게 현대로 치자면 강남 호화 아파트와 명품 살림을 공짜로 준 셈이라 당연히 많은 논쟁과 논란이 있었다. 당시 신하들은 '''"주상(主上)께서 백성을 사랑한다면 이럴 수가 없습니다. [[정명공주]]와 왕실에 내리는, 개인적인 일에 집착할수가 있습니까. 정히 주고 싶으시다면 왕 개인 자산에서 주십시오"'''라고 말할정도로 크게 비판받았음에도 정명공주 모녀를 크게 대우했다. [[인조]]는 재위 초기 발생한 [[이괄의 난]] 때 나름대로 챙겨주던 [[흥안군]]이 냅다 [[이괄]]에게 달려가 합류한 이후, 왕실의 방패가 되어야 할 종친들의 추가적인 이반을 막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는데, [[정명공주]]에 대한 우대도 그중 하나였다. 전술했듯 정통성 문제로 소성대비에게 숙여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고. ==== 죽음 ==== 소성대비(인목왕후)의 건강이 날로 좋지 않자, [[인조]]는 소성대비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홍주원]]의 품계를 한~두단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성대비는 아이러니하게도 [[1632년]](인조 10년)에 그토록 증오하던 [[광해군]]보다 빨리 세상을 떠났다. 사망 2년 전부터 더운 날씨면 병이 악화되었음과 병세를 종합하면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 악화되어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걸로 보인다. 실록에 따르면 손자뻘인 [[인조]]와 증손자뻘인 [[소현세자]]가 번갈아가며 소성대비의 간병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성대비 사후 무리하게 초상을 치루던 인조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데, 인조는 이것을 [[정명공주]]의 저주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 일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정명공주는 인조 재임 기간 중 납작 엎드려 조용히 살게 된다. 사실 전후관계를 따져보면 저주는 핑계에 불과하다. 인조는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로 집권하여 장통성과 명분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소성대비에게 굽혀야 했다. 그래서 소성대비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대비의 하나밖에 없는 딸 [[정명공주]]에게도 온갖 특혜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성대비가 사망하자 이용가치가 떨어진 정명공주를 압박하기 위해, 저주를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 === 평가 === 인목왕후 본인은 크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왕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욕심이 많다는 것은 대놓고 드러난 바 있다. 상기한대로 이미 세자가 있는 상황에서 나이 많은 왕이 세자를 멀리한다는 이유로 아들을 왕세자로 만들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러나 그런 욕심에 반해 인목왕후에겐 이전의 [[문정왕후]] 윤씨나 뒷날의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 김씨]] 같은 정치력은 없었고, 그렇다고 처세가 썩 좋은 편도 아니었다. 물론 [[유영경]]을 무시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인정한 점에서 보이듯 [[폐비 윤씨]]처럼 말도 안 되는 야심을 품진 않았었다. 친정 집안의 세가 약하고 나이도 어렸던 탓에 대비가 된 이후에도 권위가 크진 않았다. [[하성군|선조]]가 인목왕후 소생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광해군]] 견제의 수단으로 쓰지 않았거나 광해군이 조성한 살벌한 공안 정국이 아니었다면 그냥 ~~젊은~~ 어른 대접 받으며 평범하게 살았을 터였는데, 남편과 (종법상의) 아들을 잘못 만나서 불행한 인생을 산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인목왕후가 허물 하나 없는 성인 군자는 아니었고 처세술에서도 미숙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아버지와 형제, 아들까지 잃어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은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것. [[임진왜란]] 이래 [[하성군|선조]]와 [[광해군]]은 왕위를 둘러싸고 정적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 [[영창대군]]이 선조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한 게 첫 번째 불행이었고, 조정과 재야의 지지를 두루 받으며 권위가 막강했음에도 끝없이 옥사를 일으킨 광해군의 의심병이 2번째 불행이었다.[* 10년 넘게 세자위에 머무르며 전란 때 훌륭하게 분조를 이끌었다는 훈장 달고 부왕이 위협을 느껴 따져 보면, 말도 안 되는 [[명나라]]의 승인까지 거론하며 견제했던 세자가 권위가 약할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막강한 권위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스스로 자기 살 까먹고 조정의 균형을 문너뜨리는 행동을 재위기간 내내 저질렀다. 엄밀히 말해 정략에선 다음 왕 [[인조]]보다 못했다. 인조는 [[이괄의 난]]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도 재위 후반기 정국을 자기 뜻대로 이끌어가는데는 성공했다.] 조선 후기에는 [[계축일기]] 등을 통해 '어린 나이에 늙은 왕에게 시집 가 당쟁에 휘말려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가련한 왕비'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선 [[광해군]] 긍정론의 역풍을 온몸으로 받아 실제로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려려는 야심이 있었다느니, 복수심에 매몰되어 [[인조]] 정권의 권위 확립에 이용당했다느니 하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 제도사, 정치사 중심으로 [[광해군]]의 거품이 조금씩 가라앉은 다음부턴 인목왕후에 대한 일방적인 재평가도 진정되는 중.[* 여담으로 인터넷발 [[광해군]] 긍정론은, 광해군 긍정론을 집대성한 한명기 교수의 견해와도 차이가 심하게 난다. 한명기 교수는 공과를 엄연히 구분해서 외치를 제외한 내치 대부분을 과오로 평했다. 그의 저서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를 펼친 군주란 부제와 달리 3분의 1 정도는 영건 사업과 옥사, 수탈을 들어 비판하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결혼 한번 잘못했다가 과분한 욕심을 품긴 했지만, 그 욕심에 대한 댓가로 [[광해군|의붓아들]]의 손에 친정 가문과 하나 뿐인 [[영창대군|아들]]을 전부 잃고 겨우 살아남아 [[정명공주|딸]]과 함께 모진 유폐 생활을 견뎌 다시 복권돼 일생을 왕실의 대왕대비로 살았지만, 그토록 증오하던 [[광해군|의붓아들]]보다 일찍 죽은 참으로 애석한 인생을 산 여인이었다. === 대중 매체에서 === 인목왕후나 또는 그 밑의 나인, 혹은 딸 [[정명공주]]가 작성했다고 추정되는 고전 소설 [[계축일기]]에서는 완벽하게 선량한 피해자로 등장, [[악당]] [[광해군]]과 교활한 김개시의 온갖 핍박을 이겨내고 마침내 [[인조반정]]으로 대비의 자리를 되찾는 인생 드라마를 찍는 듯이 묘사된다. 계축일기는 소설이라 궁중 문학으로서의 가치는 높으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처럼 당대 정치사를 연구하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낮다. === [[사극]] === *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회천문, 남한산성) - [[권재희]] * [[서궁(드라마)|서궁]] - [[이보희(배우)|이보희]] * [[허준(드라마)|허준]] - [[홍은희]] * [[천둥소리]] - [[이현경]] * [[왕의 여자]] - [[홍수현]][* [[광해군]]을 사사건건 괴롭히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 [[구암 허준]] - [[서이안]][* 이 작품에선 적통대군을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위태(상상임신)를 하였고, 이를 허준이 정확히 파악했다. 이에 인목왕후는 "내가 강건하니 언제든 회임을 할 수 있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되었소"라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고, 선조 또한 안타까워한다. 이로부터 4년 후에 영창대군을 낳게 된다.] * [[왕의 얼굴]] - [[고원희]] * [[화정]] - [[신은정]][* 이 작품에선 시종일관 자신의 자식들인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걱정한다. 다만 광해군에 의해 친정 가문과 아들을 전부 잃은 뒤 복수심에 불타올라 딸인 [[정명공주]]와 달리 [[인조반정]]을 찬성하는 모습도 보인다.] * [[오하늬]] - [[조선로코 녹두전]] == 가족 관계 == *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 * 어머니: 광산부부인 노씨 * 언니 : 심정세에게 출가.[* 심정세의 고모할머니가 명종 왕비 인순왕후 심씨이다. 심정세의 어머니가 구사맹의 장녀인데 구사맹의 5녀가 정원군과 결혼한다. 즉 심정세와 인조는 이종사촌이며 인목왕후와 인조는 법적으로는 조손관계이며 친정쪽으로는 이종사촌 형부가 된다.] * 동생 : 김규[* 동생의 부인 즉 올케가 되는 달성 서씨의 친정 어머니가 정신옹주,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이다.] * 남편: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조선)|선조]] * 적녀: [[정명공주]] * 부마: 영안위 [[홍주원]][* [[혜경궁 홍씨|헌경의왕후(혜경궁 홍씨)]]의 5대조 직계조상으로,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5대 후손이기때문에 [[영조]]와는 12촌, 혜경궁과 [[사도세자]]는 13촌 고모-조카 관계가 된다.] * 적자: [[영창대군]] 이의 ([[1606년]] ~ [[1614년]]) [[분류:조선의 왕비]][[분류:연안 김씨]][[분류:1584년 출생]][[분류:1632년 사망]][[분류:서대문구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