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국가정보원장)] [include(틀:역대 대통령비서실장)] ||<-2><tablebordercolor=#012060><tablebgcolor=#ffffff,#1f2023><tablealign=right><tablewidth=42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2060 0%, #012060 20%, #012060 80%, #012060)" '''[[중앙정보부장|{{{#ffffff 제6대 중앙정보부장}}}]][br]{{{#ffffff {{{+1 이후락}}}[br]李厚洛 | Lee Hu-rak}}}'''}}}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070112120237197113282.jpg|width=100%]]}}} || ||<width=100><|2><colbgcolor=#012060><colcolor=#FFFFFF> '''출생''' ||<(> [[1924년]] [[2월 23일]]|| ||<(>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군]] [[웅촌면]] 석천리[[http://ul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ulsan&dataType=99&contents_id=GC80001321|#]][br](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28-3)[* [[학성 이씨]] 집성촌이다.]|| ||<|2> '''사망''' ||[[2009년]] [[10월 31일]] (85세)||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br][[경희대학교]] 동서신의학병원||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본관''' ||[[학성 이씨]][* 17세손 락(洛)자 항렬.]|| || '''호''' ||우석(又石) || ||<|4>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3대 [[대통령비서실장]]|| ||[[1963년]] [[12월 17일]] ~ [[1969년]] [[10월 20일]]|| ||<bgcolor=#f5f5f5,#2d2f34>제6대 [[중앙정보부장]]|| ||[[1970년]] [[12월 21일]] ~ [[1973년]] [[12월 3일]]|| ||<-2><:><bgcolor=#fff,#1f2023><color=#373a3c,#ddd>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able width=100%><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colbgcolor=#012060><colcolor=#ffffff> '''형제자매''' ||형 이윤락 || || '''배우자''' ||김영희 || || '''자녀''' ||슬하 6남 1녀 || || '''학력''' ||[[울산공업고등학교|울산공립농업학교]] {{{-2 (졸업)}}}[br]도쿄육군항공학교 {{{-2 (졸업)}}}[br]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2 (졸업)}}}[br][[국학대학|국학대학교]] {{{-2 (법학 / 학사)}}} || || '''종교''' ||[[불교]] || || '''의원 선수''' ||'''1''' || || '''의원 대수''' ||[[제10대 국회의원|'''10''']] || || '''경력'''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br]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br]국무총리 안보담당 비서관[br]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보실장[br] 2대한공론사 이사장[br]제3대 주일본 대사[br]제6대 중앙정보부장[br]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br]울산장학회 회장 || ||<-2> '''군사 경력''' || || '''임관''' ||[[군사영어학교]] {{{-2 (1기)}}} || ||<|4> '''복무''' ||<bgcolor=#f5f5f5,#2d2f34>[[일본 제국 육군]] || ||[[1943년]] ~ [[1944년]] || ||<bgcolor=#f5f5f5,#2d2f34>[[대한민국 육군]] || ||[[1945년]] ~ [[1961년]] || || '''최종 계급''' ||하사 {{{-2 ([[일본 제국 육군]])}}}[br]소장 {{{-2 ([[대한민국 육군]])}}} || ||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2 ([[태평양 전쟁]])}}}[br][[6.25 전쟁]]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군인]], [[외교관]], [[정치인]].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대통령비서실장]], [[주일대사]],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갈량]]의 지략과 [[조조]]의 리더십을 겸비했다고 하여 '''제갈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생애 == 1924년 2월 [[경상남도]] 울산군 웅촌면 석천리(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1943년 [[울산공업고등학교|울산공립농업학교]] 졸업 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육군에 입대해 [[일본]]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6개월 [[교육]]을 받고 [[중국]] [[하얼빈]]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은 후[[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0912100040|##]] 육군 [[하사관]]으로 임관하기에 이르렀다. [[광복]] 이후 귀국해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3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두산백과]]에서는 소위 임관이라고 되어 있는데 [[위키백과]][*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 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던 것이겠지.'' -김정렬의 증언-]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대위]] 임관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당시 [[미군]]이 일본군에서의 [[계급]]을 고려해서 계급을 부여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1949년 [[남조선로동당]] 사건으로 파면당한 박정희의 후임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가 사망했다.][* 박정희는 이 때 이후락의 밑에서 [[문관]]으로 있었고 훗날 자신의 조카사위가 되는 [[김종필]]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1951년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진급해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1952년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진급,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수료, 1957년 [[주미대사관|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에서 만들어진 [[중앙정보위원회|79부대]]라는 정보 기관의 수장이 되어[* 당시 이후락 실장의 [[군번]]이 79번이여서 이름을 '79부대' 혹은 '79호실'이라고 불렸다.] [[라오스 왕국|라오스]]에 잠입하여 밀파 활동을 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961년 대한민국 육군 [[소장(계급)|소장]]으로 예편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장면 [[내각]]이 만들어준 정보 기관인 국무총리실 산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임명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 입당 전력을 미국 [[대사관]]에 밀고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뛰어난 [[영어]] 실력과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 경력 덕분에 곧 석방되어 [[민간인]] 신분으로 [[쿠데타]] 세력에 가담하였다. [[제갈량|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친 "제갈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박정희의 [[책사]]가 되었으나 이후락을 좋게 보지 않는 쪽에서는 제갈공명은커녕 조조만도 못하다고 깐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1963년 12월 [[박정희]]가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에 취임하자 [[이동원]]의 뒤를 이어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사실 이후락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방면으로 영민했던 사람이다. 이 시기 주요 브레인이라면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만 이들은 [[관료]]에 가깝기 때문에 굳이 따지면 [[장량(전한)|장량]] 계열이라기보다는 [[소하]] 계열 브레인이다.] 1969년 [[3선 개헌]] 당시 [[이만섭]] 등 민주공화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에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부정부패]]와 3선 개헌의 막후 원흉으로 지목되어 대통령 비서실장직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1970년 1월 지병으로 사망한 [[엄민영]]의 후임으로 [[주일대사|주 일본 대사]]에 임명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대통령비서실]] 직원들에게 "여러분들은 박정희를 교주로 하는 '박정희교'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라고 했던 일화가 있었다. 주일대사로 있으면서도 박정희를 향한 그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초밥 [[에피소드]]'이다. 당시 [[주 일본 대한민국 대사관|주일 한국대사관]] 부근에 '이즈미'라는 유명한 초밥집이 있었는데 이후락은 이 집의 맛있는 [[초밥]][* 이즈미의 주인이 회고하기를 이후락은 이즈미의 초밥을 아주 좋아해서 대사관이나 외부 연회 시에 이즈미의 초밥을 별도로 시켜서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락이 [[식당]]에서 초밥을 먹고 나서 같이 온 사람들과 종종 [[화투]]를 치고는 했는데 사람이 모자라면 이즈미 주인도 끼어서 같이 화투를 칠 정도로 친한 사이였지만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이후로는 일본에 올 일이 있어도 이즈미에는 1번도 오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을 특별 주문하여 잘 포장하고 간이 [[냉동]] 상태로 대사관 [[사무관]]을 시켜 [[외교행낭]]을 실어 보내는 [[비행기]] 편으로 [[청와대]]까지 직배송을 몇 차례나 시켰다고 한다. 정성스런 [[선물]]을 받은 박정희는 이후락을 더욱 특별하게 생각했을 것은 자명할 것이다. 이 일화를 소개한 책인 '남산의 부장들' 초판이 발행될 당시(1992년) 초밥 [[심부름]]을 하던 주일대사관 사무관은 [[외교부|외무부]]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 외교관이 되었다고 한다.[* 출처 :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제1권, [[동아일보]]사.] 이는 [[황병태]] 전 국회의원의 회고록 등에서도 확인된다. 1970년 12월 제6대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하여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가장 큰 배경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김대중]] 후보를 앞세운 야당([[신민당(1967년)|신민당]])의 기세가 매서웠기 때문에 "남산골 샌님" 얘기나 듣던 [[김계원]] 대신 정치 공작과 막후 술수에 능했던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에 앉힘으로써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후락은 정치 공작의 달인답게 [[검찰]], [[경찰]], [[지방자치단체]], [[국군기무사령부|육군보안사령부]] 등 관권 조직을 총동원하여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막후에서 관리하며 박정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1960~1970년대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국 [[정치]]의 상수(常數)였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중앙정보부와 접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름과 소속을 밝히고 야당 당사, [[언론]]사, 주요 정부 기관, [[대학]] 등에 상주하면서 정보 활동을 하던 시절이다. 경찰이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으며 이들의 선거 개입을 총괄하는 것은 중앙정보부였다.][* 물론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관변 조직을 총동원하고 정부와 여당이 당시 [[금액]]으로 무려 600억~700억이라는 거금을 선거에 쏟아부었음에도 박정희는 야당 후보 김대중을 겨우 이기는데 그쳤다. 박정희는 "쓴 돈이 얼마인데 내 표가 이것 뿐이냐"고 주변을 닥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김대중의 선거 [[전략가]] 참모 [[엄창록]]을 잠시 며칠 동안 [[실종]]되게 하기도 했다. 초대 김종필부터 5대 김계원까지 역대 전임 중앙정보부장들은 절대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다.] 1971년 10월 2일 [[오치성]] 당시 [[행정안전부|내무부]] 장관의 해임 결의안을 저지시키라는 박정희의 지시에 항명한 여당 국회의원들을 중앙정보부로 연행하여 고문하기도 했는데 이 사건을 [[10.2 항명 파동]]이라고 한다.[* 이들 중에는 박정희의 처남이자 [[영부인]] [[육영수]]의 친오빠인 [[육인수]]도 끌려갔고 셋째형 [[박상희]]의 친구 [[김성곤]]은 고문 [[후유증]]으로 4년 뒤 사망했다.]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도 이후락의 [[작품]]이다.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10월 유신을 작업했던 곳은 [[궁정동]] 안가였으며 작업 [[암호]]명은 '풍년 사업'.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는 나중에 이곳에서 세상을 떴다. 이 때 [[유신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바로 [[김기춘]].[* 출처 : [[http://www.tbs.seoul.kr/news/bunya.do?method=daum_html2&typ_800=11&seq_800=10187567]]]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tongilnews.com/44950_1.jpg|width=100%]]}}}|| || 이후락과 [[김일성]]. 뒤의 인물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북한)|김영주]]이다. ||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 재임 중 대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업적]]으로는 1972년 5월 밀사로 [[북한]] [[평양직할시|평양]]을 방문하여 당시 [[주석(직위)|주석]] [[김일성]]과 비밀 회담을 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후락은 김일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신변을 매우 걱정했고 만약 북한이 자신을 감금하고 [[국가]] 기밀을 불라고 요구할 경우 [[자살]]하기 위해 [[청산가리]]까지 휴대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밤에 북한측 수행원이 이후락 일행을 불러냈고 어딘가로 향했는데 이 때 이후락은 엄청난 긴장감에 안절부절.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주석궁]]이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내리자마자 김일성이 서 있어서 굉장히 당황했었다고 한다.[* 당시 이후락은 여차하면 삼키려고 청산가리 [[알약]]을 주머니 속 오른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일성이 나타나 [[악수]]를 청하자 손을 주머니에 빼려 했는데 청산가리 알약이 [[땀]]에 붙어서 잘 안 떨어지는 바람에 엄청 당황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이를 두고 '이후락이의 기를 선제압하기 위한 [[수령]]님의 신묘한 술수'라고 [[자화자찬]]하는데 사람을 한밤중에 갑자기 불러내는 것이 [[공산권]] 국가에서는 상대를 당황하게 하여 허점을 포착하려는 고전적인 수법이기는 했다. 중국의 [[마오쩌둥]]도 [[소련]]의 [[스탈린]]에게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한밤중에 불렀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협상에서 본인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마오쩌둥의 힘을 한껏 뺀 것은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마오쩌둥은 스탈린을 찾아가서 먹고 자고 싸기만 하고 왔다고 할 정도.] 김일성은 이후락을 '이 부장 [[선생]]'이라고 부르며 평양까지 와준 것을 치켜세웠고 이후락은 자신을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이라고 소개한 뒤 김일성을 '수상 [[각하]]'라고 불렀다. 이후 만찬을 함께 하며 [[1.21사태]]에 대한 김일성의 사과 발언도 나왔다. 이 때 나눈 대화가 흥미로운데 김일성이 "이 부장 선생, 남반부에서는 왜 미 [[제국주의]] [[군대]]를 붙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라고 대화 첫마디에 [[농담]]삼아 어쩌면 기를 선제압하기 위하여 항의하자 이후락은 "수상 각하,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게 누구요. 수상 아닙니까? [[6.25 전쟁]]이 없었다면 왜 물러갔던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소?"라고 대답했고 김일성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 '''[[김일성|수상 각하]][* 당시 [[김일성]]은 [[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방북한 이후락을 "이 부장 선생"이라고 불렀고, 이후락은 [[김일성]]을 "수상 각하"라고 불렀다. 참고로 [[일본]]의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는 총리 퇴임 이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74640|마찬가지로 정계은퇴한 이후락을 "각하"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게 누구입니까? [[김일성|수상]] 아닙니까? [[6.25 전쟁]]이 없었다면 왜 물러갔던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습니까?''' >---- > [[1972년]] 5월 [[김일성]]과의 대담 中 방북에서 돌아온 후 김일성과의 대담 내용과 청산가리 일화를 [[기자회견]]하면서 이후락의 [[인기]]는 치솟았고 이후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신직수]] [[법무부]] 장관 등과 함께 유신헌법 작업을 주도하면서 최고의 권력 가도를 달리게 되지만 [[해]]가 뜨면 언젠간 지는 법. 1973년 [[사망 플래그|박정희의 차기 후계자로 이후락이 거론]]되면서 --[[장성택|독재자는 2인자 따위 안 키운다]]-- [[윤필용]]과 관련된 군 인사들이 대거 강제 [[예편]]당한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터졌고 이것은 이후락에게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또 다시 [[탄압]]을 받을지 모를 정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이후락은 박정희에게 언제 [[숙청]]당할지 모른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과잉충성|뭔가 큰 건수가 필요했고 충성다짐식으로]] 무모하게 일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그러나 이후락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한 김대중 납치 사건이 [[한국]] 중앙정보부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내 [[여론]]은 물론 사건 발생 장소인 [[일본]]을 비롯한 [[국제]] 관계까지 험악해지자 1973년 12월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여기서 진짜 재밌는 점은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 바로 전에는 주일대사였는데 하필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다. 완전 나라 [[망신]]을 제대로 저지른 셈.]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1973년 [[비밀]] 외교 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윤필용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이 박정희의 신임을 되찾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주일대사인 [[김석규]]가 김대중을 납치하기 전에 박정희의 재가를 받은 것이 확실하냐고 물었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이 독단적으로 주도했음을 암시했다. 근데 이후락은 회고에서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가 다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등 [[모순]]되는 증언을 많이 하여 [[역사학]]자들을 골때리게 만들었다. 한편 1980년 친구 [[최영근(1922)|최영근]] 전 신민당 국회의원에게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었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 해임 이후 갑자기 [[홍콩]]을 거쳐 [[영국]]으로 [[출국]]했다가 종적을 감춘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전전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처럼 [[해외]] 망명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나중에 내막을 알고 보니 영국을 거쳐 [[중남미]] [[바하마]]로 날아가서 거기서 한동안 숨어있었다고 한다. 진짜로 [[망명]]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고 평양에 다녀온 뒤 얻은 [[심장]] 질환 때문에 [[요양]]하며 겸사겸사 미국 [[유학]] 중이던 [[아들]]을 통해 "나는 박정희 정권의 비밀을 다 알고 있으니 나를 건드리지 말아라, 그러면 나도 [[입]]을 다물겠다."는 식으로 정치적 [[보복]]을 피하려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과 모종의 [[협상]]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숙청당한 후 박정희를 맹비난했던 김형욱과는 달리 박정희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박정희도 이후락에 대해서는 김형욱, 윤필용, [[강창성]] 등과 달리 숙청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향]]인 울주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투표율 1위로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였고 이후락과 [[악연]]이 있던 [[최형우(정치인)|최형우]] 신민당 후보도 동반 당선되었다.] 이후락은 당연히 민주공화당 [[공천]]을 원했으나 김대중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었던데다가 여러 [[불법]]적인 정치 공작에 관여한 것도 있어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박정희와 민주공화당 측에서 공천을 안 주었다. 하지만 이후락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각하께서 체면 때문에 공천을 안 주신거고 국회의원 당선 후 다시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남북]] 대화를 맡는다"는 말을 퍼뜨리면서 선거 운동을 했고 이것이 먹혔다. 당시 [[울산광역시|울산]]의 [[지방공무원]]과 경찰 등도 모조리 이후락 편을 드는 바람에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았던 [[서영수]]는 명색이 여당 후보임에도 야당 취급을 받고 결국 선거에서 떨어졌다. 1979년 6월 [[최치환]],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변정일]], [[김수(정치인)|김수]], [[박용기]], [[함종빈]], [[박정수(정치인)|박정수]], [[정휘동]], [[임호(정치인)|임호]], [[임영득]], [[한갑수(정치인)|한갑수]], [[홍성우(1941)|홍성우]], [[권오태]], [[윤재명]]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0.26 사건]] 이후 [[신군부]] 세력에 의하여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자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고 버티다 신군부 측에서 김종필의 부정축재에 대해 증언해주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하자 승낙하고 김종필이 연행되는데 일조하게 된다. 이 때 부정축재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치 자금을 떡고물에 비유해 "떡고물 안 흘리고 [[떡]]을 주무를 수 있나"라는 항변으로 [[재산]] 형성을 자기 합리화해 대중들을 벙찌게 하기도 하였으며 이 때문에 당시에는 이른바 '떡고물' 발언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군부의 추정에 따르면 이후락의 재산은 약 194억원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현재 [[화폐]] 가치로 약 1,200억원 정도] 군인으로 [[전역]]한 사람이 20년만에 저 돈을 모았다는거니 당시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물가]]를 따질 때 흔히 나오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의 [[한보그룹|한보]] [[대치 은마아파트|은마아파트]] 분양가가 1980년대 초반 당시 2천만원대로 지금은 20억원대 매매가를 자랑한다. 그것으로 계산하면 현재 화폐 가치로 대략 9,700억원으로 은마아파트가 비정상인 것이기는 하다. > '''[[권력|떡]]을 만지다 보면 [[뇌물|떡고물]]이 손에 묻는 법이다.''' 1985년 정치 활동 규제에서 풀렸지만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경기도]] [[광주시]]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87년 [[7.4 남북 공동 성명]] 15주년 특집 [[방송]]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도 하고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 다음날 [[신민주공화당]]을 방문해 낙선한 김종필을 [[위로]]했다. 이후 대외적인 활동은 자제했다.] [[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6892|2003년에는 생리 현상 조절도 제대로 못하는 노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언론에 공개된 이후락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009년 10월 31일에 향년 86세(만 85세)로 [[사망]]했다.[* 이후락이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시키고 2년 뒤인 1973년 8월에 무리하게 납치했던 [[김대중]]이 자기가 사망하기 2개월 전에 [[서거]]했다.] 그렇지만 [[박정희]] 밑에서 일하던 동료와 선후배 대부분은 끝이 좋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천수를 누린 셈. [[김재규]]는 10.26 사건으로 인하여 1980년 처형되었고 [[차지철]]은 김재규가 발사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김형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박종규]]는 [[간암]]으로 인해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정권이 끝나기도 전인 1985년에 죽었다.[* 여기에 언급된 박정희 정권의 2인자들 중에서는 친인척 지간이기도 한 [[김종필]]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 살았으며 김종필을 포함해서 가장 [[나이]]가 연상이다.] == 선거 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table align=center><rowbgcolor=#012060><rowcolor=#fff>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78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4선거구)[* [[울산광역시|울산]]시, [[울주군]]] || '''무소속''' || '''97,393 (48.32%)''' || '''당선 (1위)''' || || == 기타 == * 슬하에 6남 1녀를 뒀는데 차남 [[이동훈]](1948년생)은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의 고명딸 [[김영혜]]와 [[정략결혼|결혼]]한 뒤 장인에게 [[제일화재]]를 물려받았으나 [[경영]]난으로 2008년에 본가였던 한화그룹으로 도로 넘기고 2009년에 [[한익스프레스]]를 사들였다. 막내아들 [[이동욱]](1962년생)은 [[SK그룹]] 창업주 [[최종건]]의 막내딸 [[최예정]]과 결혼했다. 1980년 기준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약 194억 원의 재산이 누구를 삥뜯어서 나온 건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친손자는 [[이석환]] 한익스프레스 대표이사다. 이석환 대표는 과거 흑역사가 있는데 미국 유학생 시절이던 1994년 한국에 들어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 [[신동학]]과[* [[신준호]] [[푸르밀]] 회장(당시 [[롯데그룹]] 부회장)의 장남.] 함께 승용차를 몰고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를 달리던 중 다른 차의 운전자와 시비가 붙어[* 이들은 당시 상류층들이 주로 몰던 [[현대 그랜저|각그랜저]]를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아 프라이드|소형 프라이드 승용차]]가 그랜저 앞으로 끼어들었고 이에 격분해 [[보복폭행|프라이드 운전자를 벽돌과 화분으로(...) 두들겨 팼다.]] 이들이 격분한 이유는 "건방지게 싸구려 프라이드 따위가 어딜 감히 그랜저를 쳐다보냐"(...)였다고 한다. 문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들이 얼마 안 가서 모두 풀려났고 피해자와도 합의를 치르고 사실을 숨겼다는 점이다.]]] 운전자를 집단 폭행했다. 그리고 2020년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건]]이 발생하자 이석환 대표의 이름이 또 다시 등장했다. * 자식들이 국내외에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24|막대한 양의 부동산]]을 [[상속]]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가치가 폭등한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막대한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다. 알려진 [[부동산]] 외에도 [[https://www.asiae.co.kr/article/2017050615171995529|박정희의 거액 스위스 차명 계좌]]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고향인 [[울산광역시|울산]]에는 이후락이 설립한 [[학교]]가 많다. 현재 [[신정고등학교(울산)|신정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꾼 [[신정고등학교(울산)|우석고등학교]]는 이후락의 호를 딴 학교였고 [[학성고등학교]]는 이후락의 [[본관]]인 울산의 옛 별호를 딴 학교다.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도 이후락이 설립한 학교로 알려져 있다.[* 이들 학교들은 모두 [[남구(울산광역시)|남구]]에 있는 공업탑 로터리 근방에 위치하고 있다. 세 학교 모두 공립화되었고 울산의 일반계 [[고등학교]] 입시도 [[평준화]]되었지만 담벼락 하나를 두고 붙어있는 신정고등학교와 학성고등학교 간의 [[라이벌]] 의식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영남대학교]]의 초대 이사진 중 1명이었다. * 제 9대 국회의원 [[김원규(1925)|김원규]]는 그의 6촌 처남이었다. * 중앙정보부장 시절 [[유태인]] 차관 중개인 메나도[* 형수가 [[한국인]]인 인연으로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금융]] 브로커. 메나도가 아닌 메리도라고도 불렸으며 훗날 [[이스라엘]]의 [[기획재정부|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인터뷰집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86년, 삼성출판사),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도 등장한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인터뷰]]에서 그를 일컬어 "대단한 수완과 정보력으로 거부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에 경제 차관도 많이 주선했지만 반면에 [[빚쟁이|(빚을) 크게 씌우기도 한 사람]]"이라 평한 바 있다.]와 가깝게 지내며 그를 통해 차관을 많이 들여왔다. 간혹 상공부에서 그런 돈은 쓸 수 없다."고 하면 이후락이 다그쳐서 차관을 들여오게 했고 이렇게 유입된 차관 자금의 5~6%는 이후락 측, 정치 자금으로 다시 일정 %를 메나도 측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하지만 메나도는 이렇게 차관 [[브로커]] 노릇을 하며 모은 돈으로[* [[F-4 팬텀]] 25대 분량의 자금을 [[동북아시아]] 차관 중개로 확보했다는 후문(後聞)이 있다.] [[프랑스]] 해군 [[함정]]을 사들여[* 당시 메나도가 소유한 [[노르웨이]] 아카 조선소 이름으로 사들였다고 한다.] 고철로 분해해 두었다가 [[6일 전쟁]] 발발 후 다시 조립하여 이스라엘 해군에 제공해 [[이집트]] 해군을 격퇴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훗날 메나도는 "[[매국노|한국 관료들은 10만불만 쥐어주면 국가에 1000만불 손해가 나도 도장을 찍어준다.]]"는 회고담을 남겼다고 한다. * [[울산광역시]]([[울주군]] 포함), [[경주시]], [[포항시]](영일 포함) 등을 합쳐 [[경상동도]]를 신설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행정구역 개편]]이 이슈가 되었을 때도 비슷하게 경포울 통합 구상이 나오기도 했다. [[경상도]]가 다른 도들보다 [[면적]]이 너무 넓기도 하고 인구면에서도 3개 [[도시]]만 합치더라도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 제외한 전국 평균급은 찍으며 울산 같은 경우 [[창원시]]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중심부와는 생활권이 다르고 오히려 인접한 경주시 및 포항시와 가까운 편이기 때문이다. * 작별, 흰 구름 먹 구름, 난 못난이, 또 만나요 등의 [[히트곡]]을 남긴 1970년대 포크그룹 딕패밀리의 멤버 김후락의 본명은 홍수진인데 그룹 결성 초반에 우연히 [[MBC]] 방송국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을 만나 예명을 김후락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후락이 홍수진의 이름을 듣고 자신의 이름으로 예명을 쓰라고 했는데 [[성씨]]까지 쓰지는 말고 김이박최에서 돌 던지면 맞는 성으로 써라고 해서 예명이 김후락이 되었다고 한다.[[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253704|링크]] * 자신이 납치했던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생몰연도가 일치한다. == 대중매체에서 == ||<width=40%> [[파일:LeeHR-3.jpg|width=100%]] || [[파일:LeeHR-5.jpg|width=100%]] || || 제3공화국의 이후락 || 제5공화국의 이후락 || * MBC 드라마 [[제3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오지명]],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임채무]], SBS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와 [[삼김시대(드라마)|삼김시대]]에서는 배우 [[정욱(1938)|정욱]], [[영웅시대]]에서는 배우 [[홍성선]][* 개명 전 이름, 개명 후 홍훈으로 활동 중이며 [[허준(드라마)|허준]], [[상도(드라마)|상도]]에 출연한 이력이 있다.], MBC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박광남]]이 이후락을 연기하였다.[* 임채무와 박광남은 [[전원일기]]에서 김 회장([[최불암]] 분)의 사위들로 고정 출연했었다. 최불암은 [[제1공화국(드라마)|제1공화국]]에서 [[이승만]] 역을 맡았었다.] * MBC 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김재욱 부장이 이후락과 유사한 행보를 보인다. 사실 이름만 보면 [[김재규]]+[[김형욱]]인데 극 중 행보를 보면 제5공화국 이후 [[사업가]]로 변신한 이후락과 가장 가깝다. == 둘러보기 == ||<-5><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한국기원|{{{#000000,#e5e5e5 재단법인 한국기원 총재}}}]]''' || ||<width=30%> (초임) || {{{+1 ←}}} ||<width=30%> '''초대 이후락''' || {{{+1 →}}} ||<width=30%> 2~4대 [[김우중]] || [[분류:울주군 출신 인물]][[분류:학성 이씨]][[분류:1924년 출생]][[분류:2009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박정희 정부/인사]][[분류:대한민국의 장관급 대사]][[분류:대통령비서실장]][[분류:중앙정보부장]][[분류:제10대 국회의원]][[분류:민주공화당(1963년) 국회의원]][[분류:고려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