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right><table width=450><tablebordercolor=#0047a0><tablebgcolor=#fff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이회영}}}[br]李會榮 | Lee Hoe-yeong}}}'''}}}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회영.jpg|width=100%]]}}} || ||<|2><width=100><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1867년]] [[3월 17일]] || ||[[한성부]] [[저동1가|저동]][br](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명동1가 1-2) || ||<|2> '''사망''' ||[[1932년]] [[11월 17일]] (65세) || ||중화민국 [[다롄]] 시[br](現 중국 랴오닝 성 [[다롄시]])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 || '''본관''' ||[[경주 이씨]] [[이항복|백사공]]파 11세손[* 경주 이씨 35세손 '榮'자 항렬이다.] || || '''호''' ||우당(友堂)[* 호를 풀이하자면 '벗들의 모임터'가 되겠는데 정작 우당 선생은 사람보다 관습을 중요시했다.] || || '''직업'''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 || '''부모''' ||아버지 이유승 || || '''형제자매''' ||형 이건영, [[이석영#s-1]], [[이철영]][br]동생 [[이시영(정치인)|이시영]], 이소영, 이호영 || || '''배우자''' ||달성 서씨 (사별)[br]이은숙 (재혼) || || '''자녀''' ||아들 이규룡, 이규학, 이규동, [[이규창(독립운동가)|이규창]][br]딸 이규숙, 이현숙 || || '''친인척''' ||손자 [[이종찬(1936)|이종찬]], [[이종걸]] || || '''학력''' ||한학 수학 || || '''종교''' ||[[유교]] ([[성리학]]) → [[개신교]] ([[장로회]])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목차] [clearfix] == 개요 == > "생과 사는 다 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조선]] 말 10대 [[부자]] 안에 들던 집안의 6형제 중 넷째. 바로 아래 동생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다. == 생애 == 이회영의 며느리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하나밖에 없는 누님의 외동딸로 고종의 조카딸이다. 또한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누이 동생을 친정으로 불러들인 뒤 급사했다고 속이고 개가시키기도 했다. 조선 시대 [[여성]]의 덕목은 부군에 대한 절개이고 반가의 규수라면 이러한 잣대는 더욱 엄격했다. 하물며 명문가 중 명문가였던 우당 선생의 [[가문]]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폐풍이라고 여기고 실제로 행동했던 선생의 선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대한제국]] 때 애국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신민회]]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훗날 [[만주]] 독립 기지 건설과 연관이 된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6형제 모두가 조선 안의 [[명성]]을 포기하고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집안의 부를 보여 주는 일화가 전 재산을 급처했더니 당시 [[소]] 13,000마리 값이다. 당시 40만원이었으며 현재 시세로 환산했을 때 600억원 정도이다. 소 값이 현재와 과거에 비해 평가절하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였을 때 이 값은 2조원에 달했을 것이다. 또한 [[물가]] 상승을 제외하더라도 [[한국]]이 당시에는 전 [[세계]]에서 돈이 많은 나라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적은 나라였음을 감안한다면 상상 이상의 돈이다. 이는 다시 말하지만 급히 처분한 재산이었고 다 팔지도 못하고 일부는 버리고 갔다.[* 이회영 일가가 가졌던 땅이 아직도 [[서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싸다는 [[명동]] 일대였다고 한다. 정확히는 [[명동성당]] 건너편 YWCA에 1,000평 가까운 대저택이었다.] 이후 현지의 [[한인]] 단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후의 [[신흥무관학교]].] 건립에 참여했고 [[국내]], [[연해주]], [[상하이]] 등의 독립운동 조직에도 다수 참여했으며 고종의 [[망명]]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다. 서[[간도]] 지역 한인 단체는 사실상 이회영 일가의 재력으로 유지된 셈. 대개 무장 투쟁파들이 그렇듯 초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내부 분열시 조정 역을 맡은 적도 있으나 1921년 노선 불만의 문제로 합류하였다. 이후 만인의 자유와 권리를 외치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남화 연맹 등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체를 결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이회영 자신은 임시정부 수립을 처음부터 회의적으로 봤다. 그 까닭은 임시정부 같은 조직이 있으면 [[대통령]]이니 [[국무총리]]니 하면서 [[지위]]를 놓고 독립운동가들이 감투 싸움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그런데 그게 결국 사실이 되어 버렸다.]] 1920년대 후반부터 아나키즘 활동을 본격화하였으며 [[백정기]] 등과 함께 항일구국연맹, 흑색공포단 등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만주 지역의 [[독립군(한국)|독립군]]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는데 [[김좌진]]과 면담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며 반응은 좋지 않게 보는 편이었다고 한다. 1932년 만주에서 활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좋은 반응을 보였다. 이회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중국]] [[다롄시|다롄]] 지역에 거점을 만들려 했으나 [[밀정]]들이 이회영이 다롄에 온다는 사실을 미리 [[일본]] [[영사관]]에 알려서 체포당했고 결국 4일만에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이후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독립운동가)|이규창]](1913~2005)이 아버지를 죽게 한 밀정들을 추적한 끝에 [[이규서]]와 [[연충열]]이라는 사람들이 이회영이 다롄으로 간다는 사실을 밀고한 밀정들임을 밝혀냈다. 하필이면 이규서는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의 차남이었던지라 이규창 입장에서는 사촌지간이었고 이석영의 장남은 10대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지라 이석영에게는 남은 혈육이 이규서뿐이었다. 그러나 이규창은 용서하지 않고 이규서와 연충열을 처단하였고 결국 이석영의 대는 끊기게 된다. 이회영의 재산은 [[독립운동]] 8년만에 바닥나 아들 [[이규창(독립운동가)|이규창]]의 [[자서전]]에 따르면 "일주일에 3번 [[밥]]을 하면 운수가 대통"이라고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하니 국외 독립운동이란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 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상훈)|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졌다. == 가족과 후손 == [[파일:FB_IMG_1474743381308.jpg]] 앞줄 오른편 말년의 이회영. 본래 이회영 일가는 조부가 [[이조판서]]를 지냈을 정도였기에 [[한일병합]]을 지지하거나 묵인할 경우 일제에게서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었다. 이 부분을 잘라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실로 엄청난 [[대인]] 집안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서구권에는 [[칼레]]의 여섯 [[시민]]이 있다면 한국에는 '이회영과 그의 여섯 형제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제인 둘째 [[이석영]] 선생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대 최고 갑부였던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마석) 모란공원묘원을 지나 서울양양[[고속도로]] 인근에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동대문]]부터 80리'라고 했는데 서울 나들이를 갈 때 '동대문에 당도해서야 남의 땅을 밞았다'고 했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중랑구]] 및 경기도 [[구리시]], 남양주시 정도가 그의 땅이었을 것이다. 이석영 선생은 1934년 74세의 나이로 굶어 죽었다.[* 이 가문의 재산이 짐작이 안 된다면 이 분들보다 돈이 훨씬 적었던 [[민영휘]]의 [[친일]] 행각의 결과를 살펴보면 된다. 현재 친일한 민영휘의 재산이 아직도 대한민국에 많이 남아 있다.] 그와 그의 6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중 5명이 옥사하거나 아사하였다. 이회영 선생은 만주에서 항일에 대한 계획을 세운 뒤 다롄으로 이동하려다가 상하이 밀정에게 걸려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형인 [[이건영]]과 [[이철영]]은 병으로 사망했고 이시영을 제외한 다른 동생 1명은 소식이 끊겼다가 일가족과 함께 [[일본군]]에게 몰살당했다는 비고가 전해졌다. 만주로 떠난 뒤 소식이 행방불명되고 이후 [[신문]] 기사를 통해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신문 기사 내용이 "만주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다가 군경에 검문을 받고 수감된 뒤에 창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한 이상한 [[노인]]" 이후 자결을 했다는 내용은 [[조작]]이었고 사실은 배에서 내릴 때 체포가 돼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만주의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셨다.] 바로 아래 동생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이 되는 성재 [[이시영(정치인)|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살아서 조국의 [[광복]]을 보고 귀국했다. 여동생인 경주 이씨는 해공 [[신익희]]의 형인 독립운동가 [[신재희]]에게 시집갔으며 이회영의 조카들도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달성 서씨와 1885년에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달성 서씨가 죽은 후 1908년에 한산 이씨 [[이은숙]]과 [[재혼]]하여 3남 4녀를 낳았다. 이은숙은 이회영이 사망했을 때 영전에 조사를 써서 올렸는데 내용이 절절하여 종종 회자되고는 하는 명문이며 광복 후 '서간도시종기'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 수기를 쓰기도 했다. 달성 서씨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이규학]] 역시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협력하며 독립운동을 했는데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피난시키는 일을 맡았고 이후로도 [[충칭]]과 [[상하이]]를 오가며 연락 업무를 맡았다. 사후인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부인인 [[조계진]]은 [[흥선대원군]]의 외손녀로 직접적인 의열 활동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비밀 연락 요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넷째 아들이 전 [[국회의원]]이자 [[김대중]] 정부 때 마지막 [[국정원장|안기부장]]을 지낸 [[이종찬(1936)|이종찬]]이다. 이회영의 자녀들 중 이은숙과의 사이에서 난 4남 [[이규창(독립운동가)|이규창]][* 초명은 이규호이었다.] 역시 흑색공포단에 가담하여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상술한 대로 아버지를 일제에 밀고한 밀정인 사촌을 처단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제에 제공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밀정들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고 국내에 잠입해 밀정 [[이용로]]를 처단했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 13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 안에서도 일제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몰래 만들어 배포하다가 발각되어 4년간 독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광복을 맞이해 석방되게 되며 공로로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이외에 차녀 [[이규숙]]의 남편인 [[장기준]]도 독립운동가였으며 이규창의 장인인 [[정이형]]은 정의부 [[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5남이자 막내 아들은 [[이규동]][* 초명은 이규석이었다. 이회영이 사망했을 당시 6세였다. 1926년 2월 2일 생으로 2014년 3월 12일 작고.]으로 그의 장남이 [[변호사]] 겸 5선 [[국회의원]]인 [[이종걸]]이다. == 미디어에서 == * 2010년 <해방을 향해 쏘다, [[자유인 이회영]]>이란 제목으로 이회영에 관한 특별 기획 [[드라마]]가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평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매회 마지막에 이회영에 대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소개가 짤막하게 나왔다. 특별 기획이라서 5부작으로 방영되었고 2010년 9월 12일 종영. 이회영 역에 배우 [[정동환]][* [[불멸의 이순신]]의 윤두수, [[야인시대]]의 최동열 기자 등으로 출연.]이 분했고 [[안재모]]가 [[일본인]] 기자 기무라 준페이 역을 맡았으며 [[권오중]]이 [[백정기]] 의사로 출연했다.[* 여담으로 안재모와 정동환은 야인시대에서는 각각 인터뷰어와 기자로 출연해서 정동환이 맡은 최동열 기자가 [[김두한]]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모습으로 나왔는데 이 작품에서는 정반대로 정동환이 맡은 이회영이라는 [[미스테리]]한 인물을 안재모가 맡은 일본인 기자 기무라 준페이가 추적하는 모습으로 나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작품의 [[작가]]가 바로 [[정도전(드라마)]]의 작가였던 정현민 작가로 이 작품이 데뷔작이었다. 자세한 것은 [[자유인 이회영|해당 항목]] 참조. * 2018년 [[영화]] [[명당(영화)]]에도 후반부에 특별 출연으로 등장하였는데 배우 [[심희섭]]이 연기하였다. == 기타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에 이회영을 기념하여 개인 자금으로 건설된 우당 기념관이 존재한다.[[http://www.woodang.or.kr/|홈페이지]] 보통 [[학생]]들의 단체 관람이 주류이고 제발로 찾아오는 관람객들은 거의 드문 편이라고 하니 관심이 있다면 가보도록 하자. 일제강점기 [[역사]] 중 배우는 [[헤이그 특사]]와 [[신흥무관학교]]가 바로 이회영 선생이 주도한 독립운동이었다. 이외에도 엄청 많으니 관심있으면 찾아보자. [[파일:-14.0420-80신교동 우당기념관.jpg]] * 그가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활동지였던 남대문로에 위치한 상동[[교회]] 인근 [[버스]]정류소인 남대문시장(02-219) 정류소 명칭을 '남대문시장 앞.이회영 활동 터'로 병기한다. == 같은 가문의 일원인 인물 목록 == * 백사 [[이항복]]의 10세손 * 형님들 :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 동생들 : [[이시영(정치인)|이시영]], 이호영 * 손자들 : [[이종찬(1936)|이종찬]](2남 이규학의 아들), [[이종걸]](3남 이규동의 아들) * 친일 매국노 을사3흉 [[이하영(1858)|이하영]] *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 - [[이하영(1858)|이하영]]의 손자. [각주]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아나키스트]][[분류:온건개화파]][[분류:1867년 출생]][[분류:1932년 사망]][[분류:중구(서울) 출신 인물]][[분류:경주 이씨]][[분류:건국훈장 독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