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기의 인물로, [[고성 이씨]]의 시조이다. 『고성 이씨 명현 열전(名賢列傳)』에 따르면, [[중국]] [[전한]] [[문제(전한)|문제]]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던 이반(李槃)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바이두]]에서 찾거나 [[구글링]]을 해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정말로 이름 없는 평민이었거나, 아니면 전형적인 조상 숭배의 결과로 나타난 가공 인물일 것이다.] 고성 이씨의 구전(口傳)에 따르면 반(槃)은 춘추전국시대 인물인 '''[[노자]](老子)'''의 후손이라고 한다. [[기원전 109년]]에 한 [[무제(전한)]]가 [[왕검성 전투|조선을 침략]]할 때, 이반의 후손[* 시기상 대략 손자, 증손, 또는 멀리 가야 현손이었을 것이다.]이 도호원수(都護元帥)가 되어 우리나라에 왔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눌러 살게 되었다. [[이황#s-4|이황]](李璜)은 그의 24세손이라고 하나,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고증할 수가 없다고 한다.[*원문 遺乘云, 漢文帝時, 李槃中書舍人. 漢武討朝鮮時, 槃後孫, 以都護元帥, 出來仍居焉. 槃後二十四世孫璜, 而玄遠不可考.] 1세대 차이를 평균적으로 30년으로 잡으면, 전한 문제 때 사람이라는 이반과 고성 이씨 시조인 이황의 연대차가 약 720년이 나와야 하나, 실제로는 두 시기의 차이가 무려 1,200년에 육박한다. 이황은 [[고려]] [[덕종(고려)|덕종]]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였다고 하며,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과는 동명이인이다. 덕종 2년(1033) 1월에 [[거란]]군 일부를 사로잡은 일로 1등급 진급하였으며, [[문종(고려)|문종]] 17년(1063) 4월에는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다. 이후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졌다고는 하나, 밀직부사였던 일과 철령군에 봉해진 일은 정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일부 문헌에서는 이황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up=kh2_je_a_vsu_D2B%5E173_000&aa10no=&aa15no=&aa20no=&pageno=&imgnum=JE_A_D2B%5E173_001_000231&imgsize=%3Cbr/%3E|登第隱不仕]]]고 하기까지 하지만, 그가 관직에 이미 있었으며 끝내 호부상서까지 이른 것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좌우위(左右衛) 맹교위(猛校尉) 오행(吳幸), 이황(李璜), 신선립(申先立) 등이 거란(契丹)의 군사 7인을 사로잡아, 관직을 1급씩 하사하였다. >左右衛猛校尉吳幸·'''李璜'''·申先立等, 抄掠丹兵七人, 賜職一級. >고려사 권 5 세가 권 제5, 덕종 2년(1033) 1월 28일 을미 >이황(李璜)을 호부상서로, 박희중(朴希仲)을 섭(攝)공부상서로 임명하였다. >以'''李璜'''爲戶部尙書, 朴希仲攝工部尙書. >고려사 권8 세가 권 제8, 문종 17년(1063) 4월 30일 신축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황, version=412)] [[분류:고려의 인물]][[분류:고성 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