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contents.visitseoul.net/286_1.jpg]] ||<tablewidth=360><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315288><tablebgcolor=#fff,#191919>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의 사적}}}]]''' '''{{{#f39100 제497호}}}''' || ||<bgcolor=#315288> {{{+1 {{{#fff '''서울 이화장'''}}}}}} {{{-1 {{{#fff 서울 梨花莊}}}}}} {{{-1 {{{#fff }}}}}}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tablewidth=100%><tablebgcolor=#315288><width=22%> '''{{{#fff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장1길 32, 등 (이화동)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생활유적 || || '''{{{#fff 면적}}}''' || 6,571㎡ || || '''{{{#fff 지정연도}}}''' || 2009년 4월 28일 || ||<-2> '''{{{#fff 위치}}}''' ||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 이화장, 너비=360)]}}}}}}}}} || [목차] == 개요 == {{{+1 梨花莊 / Ihwajang}}} [youtube(nGOUwVFomU8)]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장1길 32 (이화동)에 있는 문화재이자 사적 장소. 1945년 광복 후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하면서 그의 개인 사저(舍邸)로 사용되었다가 그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경무대(現 청와대)로 이사함에 따라 '이승만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승만이 정부 수립 문제로 김구, 김규식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김구]]의 [[경교장]](京橋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던 곳이기도 했으며, 경교장, 삼청장과 함께 건국 활동 3대 명소로 불리고 있다. 1982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6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4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497호로 승격지정 되었다. == 역사 == === 조선시대 === 이 건물이 자리잡은 이화동 일대는 원래 배밭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일제 때 없어졌다. 이곳은 일찍이 중종 때의 문신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라 부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 1491∼1554)이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는데, 거기에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庭前只有李花樹 不見當時歌舞人)"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근에는 효종의 잠저인 용흥궁(龍興宮)이 있었으며, 또 인조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 제택조(第宅調)에 "인평대군의 집은 건덕방 낙산 아래에 용흥궁과 동서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데, 석양루가 있다. 기와·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 장생전은 이승만이 이곳에서 조각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이화장 정문 앞에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4·19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 광복 이후 === [[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1568416_image2_1.jpg]] 고즈넉한 저택이었던 이 곳이 정계의 무대가 된 것은 광복 이후 [[이승만]]의 사저가 되면서부터이다. 1945년 10월 이승만은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나 마땅히 국내에서 지낼 거처지를 찾지 못한다. 조선호텔에서 며칠을 머물렀으나 경비과중으로 곧 돈암장으로 옮기는데, 이 곳은 조선타이어 사장이었던 장진영에게 빌린 집으로서 3채 중 1채를 장진영(張震英)[* 일부 자료에는 장진섭(張震燮)으로 되어 있다.]이, 2채를 이승만과 비서진이 나눠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46년 신탁통치 논쟁의 혼란 속에서 이승만은 장진영에게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고, 곧 [[존 리드 하지]] 중장의 주선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가 쓰던 마포장을 얻어 이사하였다. 그러나 이 곳은 햇볕이 들지 않고 비가 오고 축축한 곳이라 하여 이승만은 불만이었다 한다. 그 후 실업가 권영일 등 30여 명의 독지가가 나서서 이승만돕기 운동을 전개했고, 이 모금에 따라 구입한 것이 이화장이다. 1947년 말에 이승만이 공식 기거함에 따라 그의 소유지가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함에 따라 경무대로 이사하게 되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이승만이 가끔 들르기도 함에 따라 대통령의 개인 사저로 잘 알려졌다. 정부수립 문제 등으로 이승만이 백범 김구, 김규식과 대립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이들의 [[경교장]], 삼청장에 맞서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지지파와 보수 진영이 집결했던 장소로 부상하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다시 기거하였다. 하지만 그 해 그가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고 1965년에 90세로 사망하면서 그의 시신이 국내로 운구됨에 따라 이승만의 시신이 잠시 봉안되기도 하였다. 호상기간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안장된다. 그 후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프란체스카]]가 1970년 귀국 후 1992년 별세할 때까지 거처가 되었다. [[파일:external/contents.visitseoul.net/286_2.jpg]] 1988년 '대한민국건국대통령우남 이승만박사기념관'으로 개관하여 역사자료 및 평소에 사용한 기구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이 본채로 사용되었으며, 말년의 프란체스카 여사가 기거하던 생활관은 본채 서쪽 언덕 아래에 있었다.] == 바깥고리 ==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6631&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서울 이화장]]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34991&cid=43667&categoryId=43667|시사상식사전 : 이화장]]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300&cid=42840&categoryId=42848|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 이화장]]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5856&cid=40942&categoryId=34709|두산백과 : 이화장]] == 사적 제497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3,04970000,11&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서울 이화장 (서울 梨花莊)]] >이화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는 그의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 > >본체인 기와집과 부속 건물인 조각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각정은 1948년 당시 초대 내각을 구성하던 곳으로 ‘이승만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원래 이 일대는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의 학자 신광한의 옛 집터로, 신대(申臺)라고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명승지였다. 인조(재위 1623∼1649)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는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서화가 강세황이 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글씨가 있었으나, 지금은 땅에 묻혀 있다. [[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서울특별시의 건축물]][[분류: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