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 align=right><bgcolor=white> [[파일:이탁2.jpg|width=200px]] || || 성명 ||이탁(李鐸) || || 이명 ||이씨종(李氏鍾) || || 호 ||명재(命齋) 또는 월양(月洋) || || 생몰 ||[[1898년]] [[6월 2일]] ~ [[1967년]] [[4월 24일]] || || [[출생지]] ||[[경기도]] [[양평군]] || || [[본관]] ||[[경주 이씨]] || || 사망지 ||[[서울특별시]]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이탁은 1898년 6월 2일 경기도 양평에서 이오복(李五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8살 때 아버지로부터 한문의 기초를 닦았고, 1916년 경신학교에 입학해 국어학자 장지영(張志暎)에게서 조선어문법 강의를 들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만주로 가서 신흥군관 학교에 재학했고, 1919년 10월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으며 1923년 8월 만주 화림학교(樺林學校) 교사를 맡았다. 1924년 9월 <신단민사(神檀民史)> 보급 건으로 검거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26년 12월 가출옥해 양평으로 귀향했다. 이후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근무했으며, 1932년 한글학회 회원으로 가입해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 표준말사정위원 등을 지냈다. [[8.15 광복]] 후 1945년 9월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부임했고, 1961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학생들에게 국어학을 가르쳤다. 또한 <언어상으로 고찰한 선사시대의 환하문화(桓夏文化)의 관계〉, 〈어학적으로 고찰한 우리 시가의 원론〉, <한국어와 중국어에 공통한 계통적 음운법칙>, <향가신해독(鄕歌新解讀)> 등 7편의 논문을 모아 〈국어학논고〉(1958)를 출판했고, <언어상으로 고찰한 우리 고대사회상의 편모>, <국어 어원풀이의 일단> 등을 발표했다. 1961년 정년 퇴임 후 서울에 거주하다가 1967년 4월 24일에 6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탁에게 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분류:경주 이씨]][[분류:양평군 출신 인물]][[분류:1898년 출생]][[분류:196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탁, version=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