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일본 제국의 정치인]][[분류:일본의 내각총리대신]][[분류:일본 재무대신]][[분류:일본 경제산업대신]][[분류: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분류:1899년 출생]][[분류:1965년 사망]][[분류:타케하라시 출신 인물]][[분류:당 대표/일본]][[분류:자유민주당(일본) 총재]][[분류:대장암으로 죽은 인물]][[분류:공무원 출신 정치인]][[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 [[분류:교토대학 출신]] [include(틀:회원수정)] [include(틀:역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 ||<tablewidth=100%><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230AE><:>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1C20B2 0%, #4449D3)" '''{{{#C3C965 이케다 하야토 관련 틀}}}'''}}} || ||<bgcolor=#fff,#19191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자유민주당(일본) 총재)] ---- }}} || ---- ||<-2><tablealign=right><tablewidth=410><tablebgcolor=#fff,#1F2023><table bordercolor=#0230AE>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1C20B2 0%, #4449D3)" '''[[일본 내각총리대신|{{{#c3c965 일본국 제58-60대 내각총리대신}}}]][br]{{{#c3c965 {{{+1 이케다 하야토}}}[br]池田勇人 | Ikeda Hayato}}}'''}}}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Mi9RvkV4AAZSpw.jpg|width=100%]]}}} || ||<|2><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width=100> '''출생''' ||[[1899년]] [[12월 3일]] || ||[[히로시마현]] 도요타군 요시나촌 (現 히로시마현 [[타케하라시]]) || ||<|2> '''사망''' ||[[1965년]] [[8월 13일]] (65세) || ||[[도쿄도]] || ||<|6>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58대 내각총리대신 || ||[[1960년]] [[7월 19일]] ~ 1960년 [[12월 8일]] || ||<bgcolor=#f5f5f5,#2D2F34>제59대 내각총리대신 || ||1960년 [[12월 8일]] ~ [[1963년]] [[12월 9일]] || ||<bgcolor=#f5f5f5,#2D2F34>제60대 내각총리대신 || ||1963년 [[12월 9일]] ~ [[1964년]] [[11월 9일]] || ||<-2><bgcolor=#fff,#1f2023><color=#373a3c,#ddd>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width=100> '''친인척''' ||전처조부 히로사와 사네오미[* 조슈 출신 유신십걸] || || '''학력''' ||제5고등학교[* 1949년 신학제 개편 때 구마모토대학에 통합되었다. 평생의 원수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동문.] {{{-2 (졸업)}}}[br][[교토제국대학]] {{{-2 (법학 / 학사)}}} || || '''정당''' ||[include(틀:자유민주당(일본))] || || '''지역구''' ||히로시마 2구 || || '''의원 선수''' ||'''7''' (중) || || '''의원 대수''' ||24, 25, 26, 27, 28, 29, 30 || || '''약력''' ||[[고등문관시험]] 합격 대장성 관료 중의원 의원 제6대 자유당 정무조사회장 제6대 자유당 간사장 제2·7·19대 통상산업대신 전일본거합도연맹 설립자 및 초대 회장 제55·61-62대 대장대신 제4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58-60대 내각총리대신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정치인]] --겸 트랜지스터 라디오 세일즈맨--, 58~60대 [[총리]]. [[히로시마현]] [[타케하라시]] 출신. == 생애 == === 총리 이전 ===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재무성|대장성]](현 재무성) 관료를 시작으로 공직에 입문하였다. 친구였던 [[사토 에이사쿠]]와 마찬가지로 이케다 또한 출세와는 거리가 먼 부침많은 관료생활을 보내야 했다.[* 대장성내에서 비주류였던 교토대 출신이었던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았다.]이후 곧 정계에 입문, 요시다 시게루의 오른팔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주로 요시다 내각의 경제 정책에 관여하였다. [[1949년]]에는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대장대신, 통상산업대신으로 재직하면서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닷지 라인이라는 강력한 긴축재정정책을 실행하였다. 때문에 경제가 일시적으로 큰 불황을 겪었는데[* 이를 닷지 불황이라고 한다. 닷지 불황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해소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케다 대신은 다음과 같은 개드립을 날린 바 있다. > '''중소기업이 5개, 10개 도산해도 어쩔 수 없다.'''(1950년 3월 1일) > '''가난한 사람은 보리를 먹으라.''' (1950년 12월 7일) 다만 실제로 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해당 발언은 이것과는 상당부분 달라서 "부실한 기업은 속히 청산해서 다른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서민들이 보리를 먹게되더라도 경제기조를 바꿔서는 안된다"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냈고 요시다 내각의 지지율을 크게 깎아먹는데 일조한 바 있다. [[사토 에이사쿠]]와는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동창이며, [[요시다 시게루]]의 휘하에서 정치 생활을 해낸 '''요시다 스쿨''' 세대. 그러나 총리 자리를 두고 동기이자 친구[* 이케다가 정계에 입문한 계기가 사토의 추천이다.][* 이케다가 총재로 선출된 직후 사토를 찾아가 고마워하며 차기를 약속했다고 한다.] 따위의 감정은 젖혀둔 채 사토가 총리 자리에 올라가는 시절은 '''지키려는 이케다와 뺏으려는 사토'''의 [[난투극]]으로 얼룩졌다. === 총리 시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58.jpg|width=100%]]}}}|| || 총리 취임 후 || [[1960년]] [[안보투쟁]]의 격화로 기시 내각이 물러나게 되면서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의 당수가 되어 1960년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관용과 인내'''라는 슬로건 아래[* 아이러니하게 안보투쟁기간동안 이케다는 통산상으로 있으면서 일관되게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각의에서 전국의 경찰관들을 도쿄로 불러모아 수당을 듬뿍주고 경비에 만전을 기하자고 발언할 정도였다.]안보투쟁을 수그러 들게한 소득배증계획의 수립으로 전후 일본 경제성장의 완성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받는다. 일본 최후의 [[19세기]] 태생 수상이었다. ([[1899년]]생) [[1961년]]에는 한국에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이에 11월 방일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회담을 한 바 있다. 이케다의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의 [[OECD]] 가입 ([[1964년]])과 [[1964 도쿄 올림픽|도쿄 올림픽]] 개최 ([[1964년]])가 일어났다. 도쿄 올림픽 폐막 다음날인 [[1964년]] [[10월 25일]] 건강 악화로 사의를 표명하여 의외로 차기 자민당 총재로 라이벌이었던 사토 에이사쿠를 지명하고 그대로 입원하였다. 그리고, [[대장암]]진단을 받아 치료를 했지만 [[1965년]] [[8월]]부터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향년 65세. '''원수 사토에게 총리 직을 스스로 넘겨준''' 걸 보면 어쩌면 죽음을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케다는 사토가 총재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비서관 이토 마사나리로부터 듣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잘됐다, 사토라면 내가 편하지' 라고 했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yato_Ikeda.jpg|width=100%]]}}}|| || 말년의 이케다 || [clearfix] == 기타 == 1963년에 일본 공산당의 노사카 산조의 조선 인민에 대한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총리는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라고 답변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참고로 그와 관련된 서적 중에 '''이케다 하야토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라는 책이 있다. 이 사람의 정치 활동이 궁금하면 읽어봐도 좋다. 참고로 저 발언은 이케가미 료이치의 만화 작품 생추어리에서도 인용되어 나온다. 프랑스 [[샤를 드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소니의 최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자랑하는둥 상황과 맞지 않는 딴소리를 한 덕분에 '''트랜지스터 라디오 세일즈맨'''이란 비아냥을 들었다. 드골이 측근에게 한 말이었는데 반드골 성향이었던 《르 피가로》에 누설되었고, 이 기사가 다시 일본 언론에 소개되면서 이케다의 체면이 구겨지게 된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양녀의 혼처를 알아보러 다닌다는 걸 알고 이케다가 자신의 조카를 소개해줘 둘을 결혼시켰다. 고로 이케다와 다나카는 사돈지간이 된다. 일본 정치사상 재계에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였던 수상[* 특히 이케다와 가까웠던 경제인 4명(나가노 시게오 신일본제철 회장·일본상공회의소 회장, 고바야시 아타루 일본개발은행 총재, 사쿠라다 다케시 닛신방적 회장·일경련 회장, 미즈노 시게오 산케이 신문 회장)을 가리켜 재계사천왕이라 할 정도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경제계가 뭉쳐 이케다를 지원하였다.]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자금 동원력도 발군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오늘날 금권정치의 대명사로 통하는 [[기시 노부스케]]나 [[다나카 가쿠에이]]도 이케다에는 못 미친다는 평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