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number.ismcdn.jp/img_6f999e69878bd8b4f17af9aa2b1372c318720.jpg|width=500]] [목차] == 개요 ==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해설가. 출중한 실력을 보유한 전도유망한 투수였으며 소속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니시테츠]]의 [[선배]]이자 [[선생|스승님]]인 [[이나오 카즈히사]][* 1969년 시즌 후 [[나가야스 마사유키]]가 [[승부조작]] 주모자로 니시테츠에서 퇴출당하자 당시 니시테츠 [[감독 겸 선수]] [[나카니시 후토시]]는 스스로 감독 직에서 사퇴했고, 후임으로 [[이나오 카즈히사|이나오]]가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이듬해 5월 이케나가가 시즌 도중 [[영구제명]] 당할 때 까지, 이나오는 그를 제자로서 지도했다.]의 뒤를 이을 [[에이스]]로 각광받았으나, 나쁜 선배의 강권으로 인해 [[승부조작]]에 연루되는 바람에[* 후술하겠지만 이케나가는 실제로 승부조작에 관여하지 않았고, 단지 선배가 억지로 쥐어주다시피 한 현금을 그대로 보관한 데다 이런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점이 꼬투리를 잡혔다.] 젊은 나이에 야구계에서 추방당하고 [[청춘]]을 허송세월해 버린 비운의 인물. == 프로필 == || '''이름''' || 이케나가 마사아키(池永正明) || || '''생년월일''' || [[1946년]] [[8월 18일]] || || '''출신지''' || [[일본]] [[야마구치]]현 토요우라 군[* 현재의 [[시모노세키시]]] || || '''학력''' || [[시모노세키]] 상업고등학교 졸업 || || '''포지션''' || [[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소속팀''' || [[니시테츠 라이온즈]](1965~1970.5) || == 학창 시절 == [[파일:ikenaga_shimonoseki.jpg]] [[시모노세키]] 상고 재학 시절 시모노세키 상업고등학교의 [[에이스]] 투수로 자리잡은 이케나가는 2학년이던 [[1963년]] 춘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선발대회]] 결승에서 [[홋카이도]] 대표인 홋카이 고등학교를 물리치고 모교 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을 거두는 데 일등 공신으로 활약했으며, 그 해 하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전국대회]]에서도 학교를 준우승으로 이끌면서 여러 프로 구단의 추파를 받아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케나가는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영입 제의를 받아들여 [[1965년]] [[일본프로야구]] 선수로 [[데뷔]]하였다. == 프로 시절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kenaga_1965.jpg|width=350]] 데뷔 첫 해인 1965년, 시즌 20승을 거두고 동료들에게 [[헹가래]]를 받는 이케나가 입단 첫 해부터 니시테츠 선발진에 입성한 이케나가는 신인답지 않은 맹 활약을 보이며 1965년 시즌 47경기 출장에 30경기를 선발로 마운드에 올라 '''20승 10패, 평균자책 2.27, 156탈삼진'''의 빼어난 성적으로 [[신인왕]]을 수상, [[이나오 카즈히사]] 이후 니시테츠 마운드의 미래를 이끌 유망주로 떠올랐다. 당시 이케나가의 입단 동기 '''오자키 마사시'''는 그의 활약에 질렸는지 '''"저런 굉장한 녀석이 입단 동기라니, 난 이제 야구로 밥먹고 살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고 토로했고,[* 실제로 오자키는 니시테츠에서 투수, 외야수로 플레이 했지만 별 다른 활약 없이 프로야구 [[데뷔]] 3년만인 1967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이후 오자키는 [[골프]]로 전향하여 '''[[점보]] 오자키''' 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은 물론 세계 무대에서 전설적인 골퍼로 남부러울 바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탁월한 선택~~] 이케나가는 신인왕 수상 소감으로 '''"나는 야구 이외의 직업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야구는 내 천직이다"''' 라면서 평생 야구에 뼈를 묻을 각오를 털어놓은 바 있다. 이듬해 1966년엔 15승 14패, 평균자책 2.18의 성적으로 약간 주춤(...) 했지만, 1967년 '''23승 14패, 평균자책 2.31'''로 [[퍼시픽리그]] 다승왕을 손에 쥐며 최고의 한 해를 구가했고, 1968년 시즌에도 23승을 거두며 2시즌 연속 20승을 기록했다. 1969년엔 18승을 따내면서 5시즌 통산 99승을 수확, 그 페이스라면 300승은 떼놓은 당상으로 여길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자랑했다. 그 외 이케나가는 [[지명타자]] 도입 이전의 [[퍼시픽리그]] 에서 타자로도 통산 [[홈런]] 13개를 때리는 등[* 5시즌 남짓한 기간동안 때린 기록으로 연간 2~3개는 담장을 넘긴 것이다. 왠만한 똑딱이 타자보다 나았던 셈. 참고로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홈런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는 20시즌 동안 38개, 연평균 1.9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당시 니시테츠 감독 [[나카니시 후토시]]는 이케나가에 대해 '''"매년 20승은 확실하니까 투수로 전념시키고 있지, 15승 정도의 투수였다면 진작에 타자로 전향시켰을 것이다"'''라고 평할 정도로 야구 센스가 뛰어난 선수였고, 게다가 발도 빨라서 [[도루]]도 심심찮게 기록했다. ~~나카니시가 결단을 내렸다면 [[오타니 쇼헤이]]를 50년 정도 일찍 봤을지도~~] 타격 실력도 만만치 않은 선수였으며, 데뷔 첫 해부터 5년 연속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며 상당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런데...''' == [[검은 안개 사건]]에 휘말리다 == 1969년 시즌 종료 후 이른바 [[검은 안개 사건]] 이라 일컫는 [[승부조작]] 사건이 일본 야구계를 강타했고, 사건의 장본인 [[나가야스 마사유키]]는 승부조작의 전모를 고백하면서 여기에 연루된 6명의 니시테츠 동료 이름을 실토했는데 이 중 이케나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케나가는 당초 현금 수수에 의한 승부조작 사실을 부정했지만, [[니시테츠 라이온즈|니시테츠]]의 팀 선배였던 '''다나카 츠토무'''[* 1967년 까지 니시테츠 소속이었고 1968~1969년엔 [[주니치 드래곤즈]] 에서 활동했다.][* 이후 다나카는 경찰에 승부조작 혐의로 체포되면서 사실상 [[영구제명]] 신세가 되었다. 다만 이케나가와는 다르게 공식적으로 징계를 받진 않았는데 이미 사건이 일어난 1969년 구단의 방출 통보를 받고 그대로 은퇴했기 때문이었다.]가 진술한 승부조작 연루자의 금전 관계에 대한 상세 내용을 인정하면서 '''"난 절대로 승부조작은 안했다. ([[니시테츠 라이온즈|니시테츠]])선배이던 다나카가 나에게 현금 100만엔을 억지로 맡겼고,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뿐"''' 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경찰]] 조사 끝에 이케나가는 승부조작을 저질렀다는 정황 근거의 부족으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일본야구기구|NPB]] 커미셔너 위원회는 승부조작 및 [[오토바이]] 레이스 불법도박 베팅 연루자들의 조사 및 심의를 거쳐 1970년 5월 25일, 이케나가와 니시테츠 소속 선수 '''마스다 아키오''', '''요다 요리노부''' 3명에게 [[영구제명]] 선고를 내렸다.[* 주모자 [[나가야스 마사유키]]는 1969년 11월 28일 부로 이미 영구제명 당한 상태였고, [[오가와 겐타로]]는 1970년 6월 3일, 모리야스 토시아키는 7월 30일 각각 영구제명 선고를 받았다.] 이케나가의 제명 선고 이유는 아래와 같다. * '''다나카 츠토무에게 받은 현금을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갖고 있었던 점''' * '''승부조작 권유를 받고도 이 사실을 신고하지 않은 점''' * '''실제로 1969년 시즌 막판 2게임에 등판하여 초장부터 상대 팀 타선에 [[와장창]] 털린 점이 의심스러움''' 불과 24세의 나이에 야구계에서 쫓겨나게 된 이케나가는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고, 같이 영구제명 당한 마스다와 요다가 '''"이케나가 만은 살려달라. 그가 우리와 같은 처분을 받는 것은 일본 야구계의 큰 손실이다. 그런 투수 앞으로 나오기 힘들다"''' 라며 읍소했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게다가 이케나가와 같은 혐의임에도 '''엄중 주의조치'''에 그친 니시테츠 팀 동료 '''모토이 미츠오'''와 비교되면서, 당시 언론에서는 '''"[[승부조작]]에 대한 응징의 본보기를 위해 희생양이 된 비운의 [[에이스]]"''' 라며 이케나가를 동정한 바 있다. 결국 이케나가는 눈물을 머금고 데뷔한 지 불과 5시즌 반 만에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통산 성적은 '''238경기 등판, 103승 65패, 평균자책 2.36, 793탈삼진.''' == [[영구제명]] 이후, 그리고 사면복권 == 이후 이케나가는 친정팀의 연고지 [[후쿠오카]]를 떠나지 못하고 하카다 구의 번화가에 [[바(술집)|바]]를 차려 2007년 까지 운영했다. 그 와중에 니시테츠 시절 선배인 [[이나오 카즈히사]], [[토요다 야스미츠]], 그리고 입단 동기였던 프로골퍼 '''점보 오자키'''(오자키 마사시) 등, 이케나가의 영구제명을 애석하게 여기던 인물들이 모여 그의 영구제명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 활동 등 구명운동이 시작되었고, [[일본 국회|국회]]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확산되었다. 2001년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구단주 '''와타나베 츠네오'''까지 '''"[[일본야구기구|(일본야구)기구]]는 이케나가를 언제까지 영구제명 시킬 셈이냐?"''' 라고 강력히 부르짖었고, 이케나가의 복권 허용 분위기는 계속 무르익어 갔다. [[파일:external/homepage1.nifty.com/spo122504.jpg|width=300]] 마스터즈 리그 투수로 등판한 이케나가 2001년 12월, 일본 프로야구 은퇴 선수들을 주축으로 하는 '''마스터즈 리그'''가 출범했고, '''[[후쿠오카]] 돈타쿠즈''' 감독으로 이케나가가 취임했는데 그의 니시테츠 선배이자 스승인 [[이나오 카즈히사]]가 "그가 다시 마운드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며 이케나가에게 선수로 뛸 것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 들였다. 사실 마스터즈 리그는 영구제명 처분 주체인 [[NPB]]와 관계없는 '''프로야구 OB 클럽'''의 주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케나가가 활동하는 데 아무런 제약은 없었고 더군다나 영구제명 처분자 중 가장 억울한 인물로 동정받고 있었는지라, 이케나가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뒤늦게나마 다시 야구계로 돌아온 이케나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마스터즈 리그에서 플레이 했다. [[파일:external/www.asahicom.jp/AS20141018002329_comm.jpg|width=300]] 2014년 10월, 모교 시모노세키 상고 개교 13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이케나가 [[2005년]] [[3월 16일]] 개최된 12개 구단주 회의에서, 영구제명된 야구인도 '''15년이 경과하면 심의를 통해 제명 조치를 해제받을 기회를 주는 것'''을 골자로 야구협약이 개정되었다. 이케나가는 바로 심의를 신청하여 약 한달 후인 4월 25일, [[NPB]] 커미셔너 위원회 결정에 의해 35년만에 '''[[영구제명]] 해제 및 사면 복권 조치'''가 내려졌다. 정식으로 야구계에 복귀한 이케나가는 이후 [[일본의 사회인야구|사회인야구]]팀,[* 고향인 [[야마구치]]현 소속 야구단 이었다고 한다.] 마스터즈 리그 팀 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큐슈]] 지역 방송국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각주]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복권된 인물/일본]][[분류:1946년 출생]][[분류:시모노세키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