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제2대 국회의원]][[분류:제3대 국회의원]][[분류:제5대 민의원의원]][[분류:제6대 국회의원]][[분류:제9대 국회의원]][[분류:제10대 국회의원]][[분류:자유당 국회의원]][[분류:민주당(1955년) 국회의원]][[분류:민정당 국회의원]][[분류:신민당(1967년) 국회의원]][[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법조인 출신 정치인]][[분류:진천군 출신 인물]][[분류:1917년 출생]][[분류:2005년 사망]][[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분류:신민당(1967년) 총재 및 대표]] [include(틀:신민당(1967년) 총재 및 대표)]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chosun_400021209.jpg|width=150]] [목차] 李忠煥 1917년 09월 12일 ~ 2005년 09월 30일 == 개요 == [[대한민국]]의 [[변호사]], [[정치인]]이다. 호는 향만(香晩)이다.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범래]]가 그의 사위이다. == 생애 == 1917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경성부]]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만주]] [[대동학원]]을 졸업하였다. 만주 고등관 채용고시,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이후 [[충청북도청]] 소속 공무원으로 일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청북도 진천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자유당 [[정운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가 각각 [[민주공화당]] [[오원선]], [[이정석(1917)|이정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증평군]] 분리 전)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원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6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때 [[김영삼]] [[총재]] 편에 섰다. 이후 같은 해 9월 치러진 신민당 수습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영삼과 거리를 두고 [[이철승]] 대표최고위원과 가까워졌다. 한편 자신의 계보인 혁진회를 조직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오용운]]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철승 후보를 지지하였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이후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으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그리고 변호사 업무에 전념하였다. [[분류:경기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