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ffff><tablewidth=100%><-5><:> '''{{{#000000 이충남의 역임 감독 이력}}}''' || ||<-5><:><#ffffff>{{{#!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삼성 라이온즈 감독)] }}} || ---- [[파일:external/onimg.nate.com/200612120814347901.jpg]] 1982년 10월,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로 초청받은 이충남. ~~[[이충희|어?]]~~ || 이름 || 이충남(李忠男)[br]야마모토 타다오(山本 忠男) || || 생년월일 || [[1944년]] [[6월 28일]]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신지 || [[일본]] [[교토]] || || 학력 || 류코쿠대학부속 헤이안고교-류코쿠대학 || || 포지션 || 내야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입단 || 1966년 2차 드래프트 2위([[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 || || 소속팀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1967~1972) || || 지도자 경력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 코치(1973~1977)[br][[오릭스 버팔로즈|한큐 브레이브스]] 2군 코치(1978~1979)[br][[오릭스 버팔로즈|한큐 브레이브스]] 1군 수비·주루코치(1980~1982)[br][[삼성 라이온즈]] 1군 조감독(1983~1983.5.)[br][[삼성 라이온즈]] 1군 감독 대행(1983.5.~1983 시즌 종료) || 대학 졸업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에 제2차 지명 2순위로 프로지명을 받고 입단, 6년간 내야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한 채1972년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 난카이 호크스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특히 선수보다는 오히려 코치로 명성을 날린 경우인데, 수비코치와 작전코치로 일하면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각 팀의 전력분석을 토대로 적중도 높은 작전을 수립하여 "컴퓨터"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내놓는 작전마다 족족 들어맞고, 상대의 작전을 귀신같이 간파하는데 능했기 때문. 원래 [[OB 베어스]] 창단 감독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으나 한국에서의 연고도 없고, 재일교포에 대한 일종의 편견도 작용해서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 한국에서 재일교포로 감독에 오른 [[김영덕]], [[김성근]], [[신용균]]등 과는 다른 점이 그는 한국에서의 선수 경력이 전혀 없었고 결정적으로 한국말을 전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국내 프로구단이 지속적으로 눈독을 들였고, 그 결과 프로 원년(1982년) 우승에 실패한 후 롯데,해태[* 다만,해태는 이충남 대신 [[김응용|코끼리 감독]]을 영입하면서 80년대~90년대의 기간동안 총 9번 우승을 하게 된다.--[[전화위복]]--]와의 경쟁 끝에 삼성에서 그를 영입한다. 직책은 '''조감독'''으로~~(영화판도 아니고...)~~ 수석코치보다 조금 높은 자리고, 감독인 [[서영무]]보다 연봉이 더 높았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서 지휘권에 혼선이 발생하였고, 게다가 서영무 감독의 애제자인 [[임신근]] 투수코치를 해임했기 때문에 팀 내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이충남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었고, 선수들도 프런트의 의중이 실린 이충남 조감독에게 가까워진다. 결국 시즌 도중이던 1983년 5월, 서영무 감독이 자진 사퇴~~라 쓰고 해임이라고 읽는다~~하여 팀을 떠나면서 이충남이 정식으로 '''감독대행'''에 취임한다.[* 다만, 삼성 구단이 오늘날에도 그를 2대 감독으로 정식 인정하기 때문에, 그를 감독으로 본다. 다시 말해 감독 재임 시절에는 정식감독으로 취임하지도, 정식감독이란 호칭도 못썼지만 실질적으로 정식감독 역할을 했기에 2대 감독으로 인정한다는 소리다.] 여기에 [[장효조]], [[김시진]]이 합류했기 때문에 전력 보강도 괜찮았고 감독의 작전 능력도 좋아서 특히 볼카운트 분석이나 투구 패턴 분석을 도입했다는 점은 훌륭하다고 꼽을 수 있다. 여기에 포수 수비능력 향상에도 제법 일가견이 있었다고.[* 물론 이는 아직 낮았던 한국 야구의 수준때문에 더 빠른 향상이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일본에서 1류 코치로 인정받았으니.] 그런데... 삼성은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공동 2위에 그친다. 당시엔 1위 아니면 의미가 전혀 없던 시절이라 가을 야구 탈락.[* 당시 제도는 전기리그 1위/후기리그 1위가 한국시리즈 직행이었고 한 팀이 두번다 1위를 하면 아예 한국시리즈를 생략하고 그 팀이 통합 우승을 한 것으로 간주했다. 당시 구단수가 적어서라고는 하지만 프로야구 출범 다음해인 1983년부터 피해를 보는 팀이 3년 연속으로 나오는 등 매우 얼척없는 제도였다.][* 1983년 삼미 전/후기리그 2위, 1984년 OB 베어스 전/후기리그 2위+통합 승률 1위, 롯데 자이언츠 전/후기리그 2위, 이 3팀은 해당 년도에 모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그나마 1982년에도 편법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렸지 그게 아니었으면 OB가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 우승을 했다.][* 1985년에는 아예 한국시리즈가 생략되어버리는 등의 코미디를 찍자 한번의 수정을 거쳐 1989년에 지금과 같은 제도로 변경되었다.] 1994년~1996년 [[556]], 2009년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가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유는 감독인 이충남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아직 선수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의사소통까지 되지 않으니 자연히 팀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었다. 김영덕이나 김성근처럼 한국에서의 야구 캐리어를 쌓으며 한국 야구의 정서도 이해하고, 무엇보다 한국어가 가능했다면 사정은 좀 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건 가정일 뿐이다. 여하튼 삼성 구단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한 듯 시즌 종료 후 이충남과의 재계약을 거부했고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만, 그가 도입한 시스템은 삼성이 1980년대 강호로 군림하는데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하다. 삼성에서 퇴단한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이충남은 광고회사를 경영했고, 학생야구 지도자 자격을 회복하여 모교인 [[교토]] 류코쿠 대학의 야구부 코치로 재임 중이라고 한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감독]][[분류:재일교포]][[분류:1944년 출생]][[분류:교토시 출신 인물]][[분류:삼성 라이온즈/역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