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대한민국의 화가/ㅇ]][[분류:횡성군 출신 인물]][[분류:1909년 출생]][[분류:1969년 사망]] || '''이름''' || 이철이(李哲伊) || || '''출생''' || 1909년 2월 7일 || || '''사망''' || 1969년 12월 28일 || || '''학력''' || [[춘천고등학교|춘천고등보통학교]] 가와바다화학교 분카학원 본과 [[미술대학|미술부]] ||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화가|서양화가]]이다. 재야에서 활동해 세간의 인지도는 높지 않지만 한국 서양화 미술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인물이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다. == 일생 == [[강원도]] [[횡성군]]에서 출생하였다. [[춘천고등학교|춘천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2년부터 2년간 [[일본]] 도쿄의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이어서 1934년 분카학원(文化學院) 본과 미술부에 진학하여 1937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귀국하여 [[국전(동음이의어)#s-3|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풍부한 색감의 다분히 표현주의적인 정물화와 풍경화가 거듭 입선하면서 서양화계에 진출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의 미술학교 유학생들의 조직이던 재동경미술가협회(在東京美術家協會) 서울전에도 참가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 결성에 참여하였고,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국전(동음이의어)#s-3|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등과는 거리를 두면서 화가로서의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이 시기의 활동은 주로 학교 미술실에서 과일이나 꽃 등의 수채화와 유화 소품을 그리는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1951년에 제작한 「학살」은 무고한 양민의 살육현장을 그려 [[6.25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1954년 김종하(金鍾夏)·변희천(邊熙天)과의 3인전을 계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8년부터 1959년까지 ‘한국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표방한 [[데 스틸|신조형]]파전(新造型派展)에 참가하였고, 이 무렵부터 [[추상]]표현주의의 작품세계로 전향하였다. 또,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추상작품들을 출품하였고, 1962년부터 1968년까지는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들이 조직한 신기회전(新紀會展)에만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68년에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이듬해인 1969년에 작고하였다. == 주요 작품 == * <[[거창 양민 학살사건|학살, 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