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이집트의 역사)] [include(틀:제2차 세계 대전 참전국)] ||<-3><tablealign=right><bgcolor=#006c35> {{{#white {{{+3 '''이집트 왕국''' [br] '''المملكة المصرية'''}}}}}} || || [[파일:이집트 왕국 국기.png|width=100%]] || [[파일:이집트 왕국 국장.png|width=100%]] || ||<width=50%><bgcolor=#006c35> {{{#white 국기}}} ||<width=50%><bgcolor=#006c35> {{{#white 국장}}} || ||<-3><bgcolor=#006c35> [[1922년|{{{#white 1922}}}]] {{{#white ~}}} [[1953년|{{{#white 1953}}}]] || ||<bgcolor=#006c35> {{{#white 수도}}} ||<-2>[[카이로]]|| ||<bgcolor=#006c35> {{{#white 정치체제}}} ||<-2>[[입헌군주제]]|| ||<bgcolor=#006c35> {{{#white 종교}}} ||<-2>[[이슬람교]]|| ||<bgcolor=#006c35> {{{#white 언어}}} ||<-2>[[아랍어|표준 아랍어]], [[이집트 아랍어]]|| ||<bgcolor=#006c35> {{{#white 통화}}} ||<-2>[[이집트 파운드]]|| ||<bgcolor=#006c35> [[국가(노래)|{{{#white 국가}}}]] ||<-2>[[https://m.youtube.com/watch?v=Q2lx2VFWKzw|اسلمي يا مصر]]|| ||<bgcolor=#006c35> {{{#white 인구(1937)}}} ||<-2>15,933,000명 || ||<bgcolor=#006c35> {{{#white 면적}}} ||<-2>3,418,400 km^^2^^|| ||<bgcolor=#006c35> {{{#white 주요 국왕}}} ||초대 국왕 [[푸아드 1세]] ([[1922년|1922]] ~ [[1936년|1936]]) [br] 2대 국왕 [[파루크 1세]] ([[1936년|1936]] ~ [[1952년|1952]]) [br] 3대 국왕 [[푸아드 2세]] ([[1952년|1952]] ~ [[1953년|1953]]) || ||<bgcolor=#006c35> {{{#white 성립 이전}}} ||<-2>[[영국 치하 이집트|이집트 술탄국]],,([[대영제국|영국]]),,|| ||<bgcolor=#006c35> {{{#white 멸망 이후}}} ||<-2>[[이집트|이집트 공화국]]|| ||<bgcolor=#006c35> {{{#white '''위치'''[* 연두색으로 칠해진 [[수단 공화국|수단]]은 이집트와 [[영국]]의 공동 통치하에 있었다. 연초록색 지역은 사라 삼각지대로, 1934년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할양하였다.]}}} || || [[파일:이집트 왕국 위치.png|width=100%]]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스만 제국]]으로 독립한 직후의 [[이집트]]로, [[고대 이집트]]와는 다른 나라다. 법적으로는 [[1922년]]부터, 실질적으로는 [[1841년]]부터 [[1952년]]까지 존속했다가, [[1953년]]에 [[가말 압델 나세르]]의 쿠데타로 왕국이 해체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집트 최후의 외래 왕조이자 이집트 최후의 왕조이다.''' ~~[[청나라]]?~~ [[메흐메드 알리]]가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다고 선언한 후에 이집트는 다시 독자적인 자주국으로 거듭났다. 물론, 무하마드 알리 당대에는 대외적으로는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로 간주되었으나 이미 이 시기에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고, 1922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국제 사회로부터 독립국임을 인정받아서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19세기 중엽에 [[미국]]산 [[면화]]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값싸게 유입되면서 이집트의 국가 기간 사업이던 면화 농업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수에즈 운하]] 건설 당시에 막대한 채무를 진 바람에 그 소유권이 [[영국]]과 [[프랑스]]에 넘어가면서, 1881년부터는 경제적으로 [[영국]]에 종속되면서 1922년까지 사실상 보호국이 되었다. == 역사 == === 초기 역사 === 근대 [[이집트]]의 독자적인 역사는 1805년에 [[메흐메드 알리]]가 이집트의 태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무하마드 알리는 1799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주도한 전쟁이며, 이 원정 당시에 발견된 [[로제타 석]]이 [[고대 이집트]] 연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에 큰 활약을 끼치면서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는 그 공로로 [[이집트]]의 태수로 임명된 것이다. 그런데 [[메흐메드 알리]]는 본래 [[알바니아]]계 [[터키인]] [[이슬람교|무슬림]]으로, 그 자신은 [[이집트]]에서 널리 쓰이던 [[아랍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그래서 어지간한 대화는 전부 [[터키어#s-3|오스만 터키어]]로 했던 사람이다. 이는 그가 [[이집트]]의 자주국화와 근대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적대적이었고 이집트의 세속화와 근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이집트]]의 전통적인 무사 귀족인 [[맘루크]][* 사실 [[맘루크]]는 중세기만 해도 [[이슬람교|이슬람권 국가]]라면 어디에나 있었지만, 19세기 경에 이르면 맘루크 계층이 남아있는 곳은 [[이집트]]가 유일하게 되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황제 중심의 절대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각지의 귀족들을 숙청하거나 평민으로 격하했기 때문이다.]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리고,[* 공교롭게도, [[맘루크]] 숙청이 있던 1811년으로부터 15년 뒤인 1826년에 [[오스만 제국]]에서도 [[예니체리]]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렸다. 맘루크나, 예니체리나 [[노예]]나 비(非) [[이슬람교]] 신자들을 강제로 개종시켜서 결성한 군사 집단이 그 기원이란 점이 흥미롭다.] 이미 [[콥트 정교회]]의 전례 언어로 격하된 [[콥트어]]에 대한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거기에 [[와하비즘]]을 토벌하고 [[헤자즈]], [[수단]]까지 차지하였으며 [[유럽]]식의 무기 공장과 세속주의 성향의 학교를 설립하는 등의 세속주의 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는데, 이러한 개혁은 이미 같은 성격의 [[탄지마트]] 운동을 추진 중이던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거스르게 했다. 중앙 정부가 직접 주도하는 개혁 정책을 생까고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누가 봐도 속보이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각지의 태수들에게 참전을 요구하자, [[메흐메드 알리]]가 이에 응하는 조건으로 [[크레타]]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지배권과 [[이집트]] 태수직의 세습을 요구하는 등의 본색을 드러내었다.[* 다만 [[메흐메드 알리]]가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그리스]]의 독립을 저지하는 일에 뻗대기만 한 건 아니었다. 무하마드 알리가 이끄는 [[이집트]] 해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였고, 그곳에서 [[그리스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일으켰다. 결국 이로 인해 [[그리스]]가 서양 열강들의 개입 하에 독립하였다. 지금 현재 그리스와 [[이집트]]가 [[터키]]에 대한 반감 때문에 서로 우호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묘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에 폭발한 [[오스만 제국]]은 마침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패한 뒤라서 군대를 급하게 재정비한 상태라서 호기롭게 [[이집트]]로 쳐들어 왔으나 되려 격퇴 당하고, 거꾸로 이집트군이 [[프랑스]]에서 파견된 군사 고문단의 자문 하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는 등의 [[역관광]]을 가했다. 심지어는 [[이집트]]를 공격하라고 파견된 [[오스만 제국]]의 해군 함대가 하라는 전쟁은 안 하고 오히려 [[메흐메드 알리]]에게 투항해 버리자, 결국 당시의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터키어]]로 황제라는 뜻이다.]이던 [[마흐무트 2세]]는 [[화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만만해하며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확전을 반대하던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및 [[다마스쿠스]]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중재하려 했지만, 무하마드 알리가 거부하고 충돌을 벌여서, [[이집트]]-[[시리아]] 간의 [[동군연합]]은 와해되고 말았다. 결국 1841년에 양자는 점령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반환하는 조건으로 [[이집트]]의 자치권과 태수직의 세습을 인정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이 때부터 [[이집트]]의 독자적인 근대사가 시작되었다. === 자치 이후에서 독립 직전까지 === 독립은 실패했지만 [[이집트]]를 [[오스만 제국]] 내의 자치령으로 만들고 태수직 세습에도 성공하는 등 소기의 목적을 거의 달성한 [[메흐메드 알리]]는 이후로도 개혁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고, 1849년에 무하마드 알리가 사망한 후에 즉위한 태수들 역시 개혁 정책을 지속했다. 문제는 제4대 태수이던 [[무하마드 사이드 파샤]]가 [[수에즈 운하]]의 건설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 [[수에즈 운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집트/역사#s-1|고대 이집트 시대]]에도 이미 있었지만, 8세기 경에 군사적인 이유로 운하를 폐쇄하고 물길을 메우면서 운하가 없어져 버렸다. 현대의 운하는 이것을 재발굴한 것은 아니고 새로 파낸 물길로 되어있지만, 운하 건설 도중에 발굴된 [[수에즈 운하#s-3.1|고대 수에즈 운하]]는 운하 건설 당시에 일하던 일꾼들의 식수를 공급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당시에 [[산업 혁명]]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로 인해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는 상품의 운송비를 절감하는 문제가 대두되었으며, 이에 따라 수에즈 운하의 건설을 추진하고자 [[이집트]] 정부에게 공사를 제안했다. 당시 태수는 이 [[수에즈 운하]]가 군사적, 경제적으로 이집트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서 운하의 건설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제5대 태수인 [[이스마일 파샤]]의 치세이던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완공되었다. 하지만, 10년이나 걸린 공사로 인해 [[이집트]] 정부는 막대한 채무에 눌려 파산 직전에 몰렸고,[* 어처구니없게도 [[이스마일 파샤]]가 [[수에즈 운하]]의 개통하는 축하하는 사치스러운 개통식을 치르면서 [[이집트]]가 더더욱 [[국가 막장 테크]]를 타게 되었다는 점이다. 참고로 이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기념하여 [[이탈리아]]의 국민 작곡가인 [[주세페 베르디]]가 이스마일 파샤에게 헌정한 [[오페라]]가 바로 [[아이다(오페라)|아이다]]이다.] 이때문에 이집트의 국영 회사였던 [[수에즈 운하]]의 운영사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의 주식의 상당수를 [[영국]]에게 팔아버려야 했다.[* 당시 [[수에즈 운하]]의 운영사였던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의 최대 주주는 [[이집트]] 정부와 [[프랑스]] 정부였다.] 이때부터 [[이집트]]는 영국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고, 1922년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하기 직전까지 영국의 보호령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이집트]]의 민족주의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 시기에 오늘날까지 [[이집트인]]들의 국가적인 영웅으로 칭송받는 [[아라비 파샤]]가 등장하게 되었다. 일전에도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속령으로 간주되던 이집트를 완전히 독립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했던 그는 1882년에 [[영국]]이 [[이집트]]를 사실상의 보호령으로 만들자,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동년 [[이집트]]의 군사 대신으로 임명된 후에는 [[영국]]이 군사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막고자 했고, 이를 위해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반영(反英) 봉기를 후원했다. 그러나 이내 [[영국]] 정부에게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이집트]] 정부는 [[아라비 파샤]]를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압력에 시달렸고, 결국 아라비 파샤는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이내 국외로 추방되는 조건으로 감형되었다.[* 나중에 [[아라비 파샤]]는 [[이집트]]로 귀국하긴 했으나, 돌아온 지 얼마 안된 1911년에 병으로 사망했으며, 끝내 [[이집트]]의 완전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렇게 [[영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된 [[이집트]]는 대신 [[영국]]으로부터 [[수단 공화국|수단]]의 공동 통치를 제안받았고,[* 근데 [[수단 공화국|수단]]은 [[메흐메드 알리]]의 치세에 이미 [[이집트]]에게 정복되어 이집트령이 된 지 오래였고, 여기서 수단 현지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선포하자 [[영국]]이 이를 진압하고 멋대로 자국령으로 선포한 상태였다. 남의 땅을 일방적으로 뺏은 셈이라서, 수단 지배의 근거를 만들고자 [[이집트]]와 공동 통치를 한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수단 지역은 오늘날의 [[수단 공화국]]과 [[남수단]]을 모두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이때 수단과 이집트 간의 국경선이 결정되었다가 1902년에 국경선이 재조정되었는데, 이 때문에 오늘날에 사실상 [[무주지]]가 되어버린 [[비르 타윌]]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 독립과 그 이후 === 그러던 중에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전쟁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이 패전하였다. 이 사건은 [[이집트]]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자, 그때까지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태수령에 불과했던 이집트가 1915년에 공물 납부를 중단하기로 선언하였다. 1914년에 이미 [[이집트]]의 마지막 태수인 [[아바스 헬미 2세]][* 아바스 헬미 2세는 [[오스만 제국]]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영국에 의해 폐위되었다.]의 후계자인 [[후세인 카멜(이집트)|후세인 카멜]][* 전술한 [[이집트]] 경제를 파탄내버린 [[이스마일 파샤]]의 아들이다. [[사담 후세인]]의 친척인 [[후세인 카멜]]과는 다른 사람이다.]이 즉위와 동시에 스스로를 '''[[이집트]]와 [[수단 공화국|수단]]의 술탄'''이라고 선포하면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당시 사실상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집트]]를 [[식민지]]로 병합하려고 하였으나, [[이집트]]인들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앞서 말했던 후세인 카멜을 술탄으로 하는 [[영국]]의 보호국인 이집트 술탄국이 선포된다. 영국은 전쟁에 협력하면 이집트를 독립시켜주기로 했으나, 전쟁이 끝나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에 반영 감정이 고조되었고, 반영 민족주의 정당인 와프드당이 탄생했다. 이집트인들은 이 와프드당을 중심으로 [[1919년 이집트 혁명|독립혁명]]을 일으켰고, 영국은 이집트를 독립시키기로 했다. 1922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브르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고 [[터키|터키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면서 [[이집트]]의 독립이 국제 사회에서 공인되었고, 이집트는 [[입헌군주정]] [[왕국]]인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는 [[영국]]에 종속된 상태였고,[* 사실상 영국의 보호국으로 취급되었다.] [[수에즈 운하]] 역시 [[영국]]과 [[프랑스]]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운하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수에즈 운하]]의 주변 지역에 군대까지 주둔시키자[* 이후에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것을 계기로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이 완전히 [[영국]]에게 넘어갔다.] [[이집트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사실상 [[영국]]의 허수아비로 전락한 왕실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바로 옆에 [[리비아]] [[이탈리아령 리비아|식민지]]를 두고 있던 [[이탈리아 왕국]]은 1940년에 [[이집트]]를 침공한다. 이후 [[나치 독일]]도 개입해서 같이 이집트를 침공한다.[* 그런데도 이집트는 대독 선전포고를 1945년에 했다. (1945년 이탈리아 왕국은 항복하여 연합국으로 전향환 상태였다.)] [[이집트군]]은 [[나치 독일군|독일군]]이 개입하자 대처하지 못해 서부 지방을 이탈리아·독일군에게 점령당했고 일시적으로 이탈리아가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이 아프리카 전선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이탈리아 왕국군|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초기에 유리한 듯 했으나 [[영국군]]에 패배하고 [[이집트]]는 승전국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수에즈 운하]]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이집트]] 영토에 대해 [[영국]]이 손을 떼자, [[이집트]] 내에서는 반(反) 왕실 여론이 팽배해졌다. [[이집트]] 공화주의 운동이 결정적으로 큰 탄력을 얻게 된 것은 [[제1차 중동전쟁]]에 의해서였다. === 멸망과 공화국 성립 ===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자, 이를 저지하려는 [[아랍]] 국가들에 의해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는 이스라엘이 수도인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서부 일대만 남기고 패퇴했을 정도로 수세에 몰렸으나, 이내 서방 국가들의 지원으로 [[이스라엘군]]이 오히려 군사력으로 우세하게 되면서 결국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고 이스라엘의 독립이 확정되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애써 건국한 나라가 멸망하면 또다시 [[홀로코스트]]와 숱한 [[유대인]] 차별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공포에 떨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만일 [[제1차 중동전쟁]]에서 패했다면, [[아랍인]]들의 보복으로 [[중동]]에서 [[유대인]] 세력이 씨가 말랐을 것이고, [[유대인 경찰연합]]의 내용이 현실에 도래했을 것이다. [[시오니즘|시오니스트]]들의 병크를 옹호해 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살겠다고 [[팔레스타인]] 땅으로 대거 이주해 들어온 [[유대인]]들을 무조건 내쫓으려고 했던 아랍인들도 잘한 건 없는지라, 전쟁 당시에도 [[아랍]] 국가들은 [[영국]]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비난을 받았다.] 이 전쟁의 와중에 [[이집트]]도 [[이스라엘군|이스라엘 공군]]으로부터 숱한 폭격을 받았기 때문에, 왕실은 패전에 대한 갖은 원망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당시 [[이집트 육군]]의 대령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실권을 잡자, 당시 국왕이던 [[파루크 1세]]는 급히 아들인 [[푸아드 2세]]에게 왕위를 넘겼지만, 이내 나세르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왕실을 [[이집트]]에서 축출해 버렸다. 이때가 1953년 6월 18일로, 이 날에 '''[[이집트/역사|장장 5천여년을 아우르던 이집트의 군주제는 종결된다]]'''. 그리고 [[가말 압델 나세르|나세르]]는 [[제2차 중동전쟁]]을 통해 [[영국]]의 영향력을 축출해 버리고 [[이집트인]]들의 숙원이던 [[수에즈 운하]]의 반환도 성사시키면서 이집트에 공화정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분류:이집트의 역사]][[분류:20세기 멸망]][[분류:이슬람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