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存昌 [[1752년]] ~ [[1801]]년 [목차] == 개요 == [[한국 가톨릭]]의 순교자. [[세례명]]은 루도비코. 조선후기 신유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으로서 '내포의 사도'라 불릴 정도로 전교 상의 공헌이 지대한 인물이다. 단적으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한 달레(Dallet,C.C.)신부 오늘 우리 교우 대부분들이 그가 그때 입교시킨 자들의 후손이라고 언급하였다. == 생애 == [[충청남도]] [[예산]]의 농민 출신의 학자로, 초기 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權日身)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 뒤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하에 신부가 되어 충청도 지방을 맡아 전교에 힘쓴 결과 내포(內浦)의 사도로 불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알고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하여 윤유일(尹有一)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에 보냄으로써 마침내 주문모(周文謨)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에 관해서는 [[나홀로 신앙]] 참조] 그러나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못 이겨 한 때 배교하여 홍산[* 지금의 충남 부여군의 일부분이다.] 으로 이사 갔으나, 전날의 배교를 뉘우치고는 더욱 열심히 전교하였다. 그 결과 내포와 그 인근지방은 다른 어느 고장보다도 천주교가 가장 성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김대건]]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고, 복자 [[최양업]] 신부는 그 생질의 손자가 되는 등, 조선 말기의 신자 중 대부분이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였다. 그러다가 1795년 말에 그는 다시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4월 8일 [[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아 공주감영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다. [[분류:가톨릭 순교자]] [[분류:예산군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