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align=center><tablewidth=100%><:><#4eae47>'''[[도정궁#s-5|{{{#FAFAD2 도정궁의 역대 주인}}}]]''' || ||<width=30%><:> 4대 [[응천군 이돈]] ||<:> {{{+1 →}}} ||||<width=30%><#4eae47><:>'''{{{#FAFAD2 5대 이정한}}}''' || {{{+1 →}}} ||<width=30%><:> 6대 [[이홍일(1640)|이홍일]] || ---- ||<-3><tablealign=right><table width=400><tablebordercolor=#4eae47><bgcolor=#4eae47> {{{#FAFAD2 '''도정궁 4대 사손'''[br]{{{+1 '''이정한[br]李挺漢'''}}}}}} || ||<-2><width=30%><bgcolor=#4eae47> '''[[본관|{{{#FAFAD2 본관}}}]]''' ||<(> [[전주 이씨|전주]](全州) || ||||<:><bgcolor=#4eae47> '''[[이름|{{{#FAFAD2 이름}}}]]''' ||<(> 정한(挺漢) || ||||<:><bgcolor=#4eae47> '''{{{#FAFAD2 초명}}}''' ||<(> 대승(大承) || ||||<:><bgcolor=#4eae47> '''[[자(이름)|{{{#FAFAD2 자}}}]]''' ||<(> 수보(秀甫) || ||||<:><bgcolor=#4eae47> '''{{{#FAFAD2 생부}}}''' ||<(> [[응천군(1579)|응천군]] || ||||<:><bgcolor=#4eae47> '''{{{#FAFAD2 생모}}}''' ||<(> 성산현부인 [[성주 이씨]](星州 李氏) || ||||<:><bgcolor=#4eae47> '''{{{#FAFAD2 부인}}}''' ||<(> 정부인[*A 사후 추증.] [[파평 윤씨]](坡平 尹氏)[br]정부인[*A] [[청송 심씨]](靑松 沈氏) || ||||<:><bgcolor=#4eae47> '''{{{#FAFAD2 자녀}}}''' ||<(> 1남 6녀[*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가족)|양자]]이다.] || ||<|2><:><bgcolor=#4eae47> '''{{{#FAFAD2 생몰[br]기간}}}''' ||<:><bgcolor=#4eae47> '''[[음력|{{{#FAFAD2 음력}}}]]''' ||[[1601년]] [[9월 25일]] ~ [[1671년]] [[8월 30일]] || ||<:><bgcolor=#4eae47> '''[[태양력|{{{#FAFAD2 양력}}}]]''' ||[[1601년]] [[10월 20일]] ~ [[1671년]] [[10월 2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출신 [[문신]]. [[덕흥대원군]]의 현손자이고 도정궁 제4대 사손이자 제5대 주인이다. == 생애 == 1601년([[선조(조선)|선조]] 34년)[* 선조는 이정한의 작은'''증조할아버지'''이다. 하지만 나이는 불과 49살 차이난다. 즉, 이정한은 [[효종(조선)|효종]]과 같은 항렬이다.] 9월 25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도정궁|당은군 사저]]에서 [[응천군(1579)|응천부정 이돈]]과 성산부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른 종실 출신들처럼 [[음서]]로 관직에 나가 참봉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년) 아버지 응천도정을 잃고 [[덕흥대원군]] 사손이 되었다. [[인조]] 즉위 직후인 1626년(인조 4년) 7월에 작은할아버지 진성군 이해령 등이 '덕흥대원군의 사손이지만 왕의 4대 후손 이후로는 종친 대우를 받지 못해 돈녕부 도정(都正)의 직을 세습하는 제도가 끊겼으니 이를 다시 복구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돈녕부는 [[임금]]과 [[왕비]]의 친인척을 예우하기 위한 부서였다.[* 원래는 종친이 아닌 임금의 친족 및 외척을 관리하던 부서였다. 처음에는 친족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소속인원이 너무 많아지는 등 여러 폐단이 생겼다. 그래서 1437년([[세종(조선)|세종]] 19년)에 [[국성]]인 [[전주 이씨]]의 경우, 왕과 9촌 이상인 친족으로 범위를 정하였다.] '도정'은 돈녕부의 정3품 당상관 관직으로[* 이외에도 종친부와 훈련원의 정3품 당상관도 도정이라 하였다.],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세습하다가 이정한부터 왕족 지위를 잃으면서 제수받지 못했다. 이에 인조가, 덕흥대원군의 봉사손은 대대로 도정을 세습하라는 명을 내려 이정한은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제수받을 수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인 1640년([[인조]] 18년) 1월에는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거쳐 도총관(都摠管)이 되었고 이후 [[청나라]] 사신을 맞이 및 전송하는 관리직을 맡았다. [[현종(조선)|현종]] 즉위 후에는 1663년 2월에는 [[남구만]]의 건의로 파직당했다가[* [[성리학]]적 교조주의가 극대화되어가던 17세기 조선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당시 예법에는 결혼하는 신부가 시부모에게 바치는 그릇 수(器數)까지 정해놓았다. 그런데 이정한이 왕실과 가까운 가문이면서 이를 어겼다고 파직을 요청한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예송논쟁]]보다 더 [[병맛]]이다.--] 그러다 같은 해 6월에 다시 조정으로 복귀한 뒤 1665년에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임명받았다. == 사망 == 1671년([[현종(조선)|현종]] 12년) 8월 30일에 향년 71세로 별세하였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덕송리, 지금의 현 [[남양주시]] 별내동 덕릉마을 수락산 뒤편에 묻혔다. 봉분은 세 개로 만들었다. 흔치 않은 양식이다. == 가족과 자손 == 정실 부인이 두 명이었다. 정부인 [[파평 윤씨]] 사이에서 3녀를, 사별 후 재혼한 정부인 [[청송 심씨]] 사이에서 역시 3녀를 두었다. 심씨 부인 사이에서 난 장녀이자 이정한의 4녀는 [[송시열]]의 양아들 송기태와 혼인했고 이정한과 심씨 부인의 막내 딸은 [[현종(조선)|현종]]의 왕비이자 [[숙종(조선)|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명성왕후 김씨]]의 동생 김석연과 혼인해 당대 유력 가문들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아들이 없기 때문에 동생 이석한의 장남인 이홍일을 입양해 대를 이었다. 이후 도정궁 가계는 [[이홍일(1640)]] 참조. [[분류:조선의 왕자]] [[분류:도정궁 종주]] [[분류:1601년 출생]] [[분류:167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