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2><table align=right><bgcolor=white> [[파일:이장녕.jpg|width=300px]] || || 이름 || 이장녕 || || 한문 || 李章寧 || || 호 || 백우(白于) || || 생몰년도 || 1881년 5월 20일 ~ 1932년 1월 24일 || == 개요 == 이장녕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으로 활동한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이다. == 생애 == 이장녕은 같은 독립운동가 [[이동녕]]과 같은 [[연안 이씨]]로 대단한 집안 출신으로,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하다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자 1907년 11월 가족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3개월간의 이동 끝에 중국에 도착한 이장녕은 독립운동을 위해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고, [[이회영]] 등 동포들이 망명해오자 그들의 정착을 도와주었다. 또한 이회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교관과 교장을 역임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썼다. 1919년에는 [[서일]], [[김좌진]], [[조성환(1875)|조성환]]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참모장으로 활동, 단기속성 사관학교를 부속으로 세우고 [[이범석]]과 함께 교관을 맡기도 한다. 한편으로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때 주요한 역할을 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전력을 보존한 독립군들은 밀산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이동녕은 참모장,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 이장녕은 참모총장을 맡았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세력이 큰 피해를 입자 중국으로 피신한다. 이장녕은 포기하지 않고 [[홍진]], [[신숙(1885)|신숙]], 홍범도, [[지청천]]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감찰을 맡고, 만주사변이 일어나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는 등 항일투쟁을 지속한다. 그러나 1932년 1월 24일 돌연 마적에게 자신과 일가족이 모두 살해당했다. 사후 공적이 인정되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 참고 자료 ==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53~54p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연안 이씨]][[분류:1881년 출생]][[분류:1932년 사망]][[분류:살해된 인물]][[분류:건국훈장 독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