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보건복지부장관)] [include(틀:제1공화국의 국무위원)]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yonhapnews_28442112.jpg|width=150]] 李允榮 [[1890년]] [[8월 19일]][* 양력 10월 2일] ~ [[1975년]] [[10월 15일]]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관료, [[목사]]이다. 본관은 [[이(성씨)|단양]](丹陽)[[http://www.ccdail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48318|#]]. == 생애 == 1890년 8월 19일 [[평안북도]] [[영변군]]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사(白史)이다. 1907년 3월 영변군 숭덕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대학교|숭실학교 사범과]]와 [[감리교신학대학교|감리교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자, 목사로 주로 활동하였다. 숭실학교 졸업 후 [[희천군]] 대성학교에서 교원으로, [[춘천시|춘천군]] 창명학교(昌明學校)·[[운산군]] 광동학교(光東學校)·[[순천시|순천군]] 일신학교(日新學校)·[[펑톈]] 운산보통학교 등에서 6년간 교장을 지냈다. 1919년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 신창교회 목사로 부임하던 중 3월 5일 신창면에서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약 1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감리교회|기독교조선감리회]] 목사로 활동하면서, [[진남포]]·[[개성특별시|개성]]·[[평양특별시|평양]] 등지에서 [[감리사]]를 지냈다.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감리교신학대학교|경성감리교신학교]]·기독신보·기독교서회·평양기독병원 등의 이사 등을 두루 지내고 평양기독교연합회장, 재조선미국선교부 재단이사, 조선감리회 서부청년회장을 맡는 한편, 평양 광함중학교(光咸中學校) 이사장, 평양 정의고등여학교(正義高等女學校)·요한학교(約翰學校)·여자성경학교(女子聖經學校)의 상임이사장 겸 설립자, 재단법인 영변 숭덕학교(崇德學校) 이사 등을 지내는 등 기독교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목사 파면처분을 받았다. [[8.15 광복]] 직후, [[조만식]] 등과 함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부당수로 선출되었다. [[신탁통치]] 반대 결의 밀서를 [[서울특별시]]로 보낸 것이 당내에서 문제가 되었고 이어 [[최용건]] 등이 당권을 장악하자, 1946년 2월 월남했다. 월남해서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고 월남 직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하여 부위원장이 되었고 조선민주당을 재건하여 수석최고위원이 되었다. 이 밖에 대한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 대표, 재남이북인애국단체연합회 위원장, 재남이북인대회 위원장, 조선민족대표단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갑 지역구에 조선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첫 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요청으로 국회 개원을 감사드리는 의미의 기도를 주도하였다. 국가 공식문서인 국회 회의록에 당당하게 하나님, 아멘... 등등이 나온다. --서울을 봉헌하겠다는 [[이명박]]보다도 스케일이 큰 듯?-- 이것은 당시 시대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조선말 대한제국 시절에 기독교는 사람들이 기존의 전근대 사상에서 벗어나 신문물과 개화사상을 받아들이는 큰 통로였다. 일제시대에도 [[김구]], [[안창호]], [[이승만]], [[서재필]]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사회 지도층의 상당수는 기독교인들이었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학습한 통로였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도 목사만 10명이었으며 단순 신자까지 합치면 더 많았다. 이후 [[국무총리]] 서리, 제2대 [[보건복지부장관|사회부 장관]], 제1~4대 [[무임소장관]], [[신흥무관학교|신흥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내각에서 [[이승만]]에 의해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제헌국회에서 '''헌정 사상 최초로 부결되어''' 국무총리에 임명되지 못했다. 대신 [[이범석(1925)|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범석의 후임 국무총리로 다시 지명되었지만 1950년 4월 7일 국회에서 다시 부결되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407002091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4-07&officeId=00020&pageNo=1&printNo=8227&publishType=00010|#]], 또 그 해 8월 3번째로 지명되었지만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1952년 10월 '''또''' 국무총리로 지명되었으나(...) 또다시 국회에서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어 결국 '''4번씩'''이나 정식 국무총리가 되지 못하고 국무총리 서리로만 남게 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목사 일에 전념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국민의당(1963년)|국민의 당]] 최고위원을 맡았다. 1970년 [[통일부|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냈다. 1974년 10월 15일 별세했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서울 제2선거구([[종로구]] 갑)) || [[조선민주당]] || '''20,497표 (56.11%)''' || '''당선''' || || == 둘러보기 == [include(틀:제헌 국회의원/서울특별시)] [[분류:영변군 출신 인물]] [[분류:단양 이씨]] [[분류:실향민]] [[분류:대한민국의 목사]] [[분류:1890년 출생]] [[분류:1974년 사망]] [[분류:제헌 국회의원]] [[분류:사회부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