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학부대신)]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191919><tablealign=center><tablebgcolor=#191919> '''{{{+1 [[일제강점기|{{{#fff 일제강점기}}}]] [[조선귀족|{{{#fff 조선귀족}}}]]}}}''' || || {{{#!wiki style="margin: -0px -10px" {{{#fede58 {{{#!wiki style="margin: -6px -1px" {{{#555555,#aaaaaa ||<tablewidth=100%><bgcolor=#fff,#222><width=20%> '''[[자작(작위)|{{{#191919,#e5e5e5 자작}}}]]'''[br]--이용직-- || || {{{-1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 [[파일:220px-李容稙_Lee.jpg]] [목차] == 개요 == 李容稙 (1852 - 1932) 구한 말의 문신. [[경술국치]] 당시 학부대신의 직위에 있으면서 병합 조약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하였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치만(稚萬), 호는 강암(剛庵). 사과 승조(承祖)의 아들이며, 을사조약 때 분사(憤死)한 [[조병세]](趙秉世)의 사위이다. == 생애 == 경술국치 당시 내각 회의에서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견지하다가 일본의 수해를 위문하는 특파 사절 명목으로 파견되어 사실상 쫓겨났던 전력이 있으며, 한일 합병이 결정된 어전 회의 당일에는 자택에 칩거하였다.[* [[이완용]]이 그에게 어전 회의가 있다는 걸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내각 회의 당시 자리를 박차며 이완용에게 '''"[[칼빵|칼침]] 맞으려거든 당신만 맞으시오. 난 그러고 싶지 않소."'''라고 했다. (그리고 [[이완용]]은 인력거를 타고 가다 [[이재명(독립운동가)|이재명 ]] 의사에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정말로 칼빵을 맞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생긴 폐렴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고생했고, 결국 그 폐렴이 직접적인 사인이 되었다. [* 당시 이완용이 중상을 입고 받은 그 수술이 '''한국 외과 수술 1호'''였다. 집도의가 일본인이었는데, 후일 회고하기를 "외과술이 10년만 늦었어도 완용은 죽었다."라고...]) 하지만 그가 조약을 반대한 것만을 가지고 그가 반일주의자였다거나 독립운동가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는 일본이 조직한 친일 어용 유림 조직인 공자교회(孔子敎會)[* [[http://blog.daum.net/jsgroupb/942|“反儒 매국의 공자교 - 이토가 뒷돈 대주며 親日 전위 부대로 이용”, 《종교신문》]], 2004년 3월 18일 작성. 2008년 5월 29일 확인.]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일본에 통치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일제가 내려준 자작 작위를 받아들였고 성균관 부제학의 자리를 수락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던 것은 확실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김윤식(조선)|김윤식]]과 함께 일본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가 작위를 박탈당했다. 덕분에 “선항일 후친일은 처벌하나 선친일 후항일은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서 [[김윤식(조선)|김윤식]]과 함께 제외된다. 친일'파'이긴 하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반민족행위자']]는 아닌 경우. == 관련 문서 == * [[경술국치]] * [[3.1운동]] == 둘러보기 == [include(틀:조선귀족)] [각주] [[분류:온건개화파]][[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분류:1852년 출생]][[분류:1932년 사망]][[분류:조선귀족 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