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other1=동명이인,rd1=이용구(동명이인))] ||<-2><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ordercolor=#b0313f><bgcolor=#fff,#191919> {{{#b0313f,#b0313f '''[[일진회|{{{#b0313f 일진회 회장}}}]][br]{{{+1 이용구}}}[br]李容九 | Lee Yong-gu'''}}}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31627_176509_2102.jpg|width=100%]]}}} || ||<tablebgcolor=#b0313f><width=100><colcolor=#fff> '''성명''' ||<colbgcolor=#FFF,#1f2023><(> 이용구 (李容九) || || '''이명''' ||<(> 이우필 (李愚弼), 이만식(李萬植)[br]이성순(李聖順), 이상옥 (李祥玉/李相玉/李尙玉) || || '''본관''' ||<(> [[벽진 이씨]](碧珍) [[http://www.e-donghak.or.kr/sa/listDetSa.jsp?pLevel=4&pDatabaseID=prd_0163r&pRecordID=prd_0163r_004_001|#]] || || '''자''' ||<(> 대유(大有) || || '''호''' ||<(> 해산(海山) || || '''출생''' ||<(> [[1868년]] ([[고종(대한제국)|고종]] 5) [[2월 14일]] || || '''사망''' ||<(> [[1912년]] [[5월 22일]] (향년 55세) || || '''직업''' ||<(> [[종교인]], 정치가 || || '''종교''' ||<(> --[[천도교]](동학)--[br]→ [[시천교]] || || '''도호''' ||<(> 지암(智菴)[* [[동학]]교도로서의 도호], 봉암(鳳菴)[* [[시천교]] 교주로서의 도호]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진회|우리]]는 참 [[친일|바보짓]]을 했어요.[br]혹시 [[1904년|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 >---- >[[이용구]], [[1912년]] 李容九 1868년 2월 14일~1912년 5월 22일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인]], [[종교인]]. [[일제강점기]] 직전 [[일진회]] 회장을 지냈던 [[친일파]]로 1910년 [[한일병합]] 때 [[이완용]] 등과 함께 한일병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후 [[일본 제국|일제]]에게 [[토사구팽]]당하고 [[귀족]] 작위도 거절하는 등 허탈해하다 1912년 [[사망]]했다. 본관은 [[벽진 이씨|벽진]](碧珍)[* 32세손 원(元) 운(雲) 우(愚)'' 노(魯) 항렬][[http://www.e-donghak.or.kr/sa/listDetSa.jsp?pLevel=4&pDatabaseID=prd_0163r&pRecordID=prd_0163r_004_001|#]]. 자는 대유(大有), 호는 해산(海山), 동학교도로서 도호는 지암(智菴)이고 [[시천교]] 교주로서 도호는 봉암(鳳菴)이다. 초명은 이우필(李愚弼)인데 이후 이상옥(李祥玉, 李相玉, 李尙玉)·이만식(李萬植)·이성순(李聖順) 등의 이름을 사용한 바 있다. 이용구라는 [[이름]]은 [[동학]]의 제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하사]]한 이름으로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의 9개 구절을 담고 있다는 의미이다. 당시 이용구가 동학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보여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 생애 == 1868년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 진두마을에서 이일화(李一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농사]]를 짓다가 1890년 동학에 입교(入敎)하여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의 교육을 받았다. 투철한 [[신앙]]으로 손병희와 함께 최시형의 고제(高弟, 뛰어난 학식과 품행을 지닌 [[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 농민군으로 [[참전]]하였으며 손병희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03년 [[귀국]]하여 동학 포교(布敎) 운동을 벌였다. 외세의 침탈과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국내에서는 [[아시아]]가 뭉쳐 서구 열강을 몰아내자는 취지의 [[아시아주의]]가 큰 지지를 받게 된다. 동학의 제3대 교주인 손병희는 봉건적인 대한제국을 바꾸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는 방안으로 아시아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로 한다. 손병희는 아시아주의를 바탕으로 동학을 근본으로 한 [[국가]]의 개조를 꿈꾸었으며 이때부터 여러 민회를 만들고 일본과 일시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하지만 이용구는 아시아주의에서 더 나아가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자는 '대동합방론'에 심취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명분으로 아시아가 뭉쳐 대동국을 이루고 일본과 [[한국]]이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개소리]]를 선전하였고 이용구는 어리석게도 이를 철썩같이 믿게 된다. 이용구가 바라던 한일 합방의 모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모티브로 대한제국과 일본이 1:1로 대등 합방하여 열강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일본의 대동합방론(이 사상은 차후 [[대동아공영권]]으로 발전한다)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목적하에 일본 [[우익]]에서 만들어낸 사상으로 이용구가 원했던 합방과 정반대의 입장이였다. ||<table align=center><tablewidth=250><tablebordercolor=#dddddd,#383b4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95B4B3E5A683EBE14.jpg|width=100%]]}}} || 이용구는 1904년경 '대동회'를 결성하는데 이후 대동회는 '진보회'로 명칭을 바꾸고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병한다. 이때부터 이용구는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용구는 일진회를 만들고 일진회 회장이 된 뒤 일본의 우익 인사 [[우치다 료헤이]]와 그의 단체 [[현양사|현양사(玄洋社)]]의 도움으로 친일 행위에 나서게 된다. 이용구는 [[백성]]들에게 일본의 사상을 전파하고 친일 행위를 찬양하며 한일병합을 제창하고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까지 한일병합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을 하게 되었다. 이용구의 친일 행동은 국내에서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되었다. 이에 1905년 손병희는 노골적인 친일 행동을 일삼는 이용구와 62명의 동학 [[지도자]]를 동학에서 축출함과 동시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다. 이용구는 출교 처분을 당한 후 동학 시절 옛 동지였던 손병희의 천도교에 맞서 친일 성향의 신흥 [[종교]]인 시천교(侍天敎)를 창시하여 시천교 교주가 되었다. === 최후 === 이용구와 일진회는 친일에 대한 보상으로 몇몇 간부가 관에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모든 국민들의 [[역적]] 1순위가 되었다. 각종 [[의병]]의 타도 대상이 되었으며 수많은 [[테러]]에 시달렸다. 더욱이 송병준을 싫어했던 이완용은 송병준과 하나가 된 일진회를 고깝게 보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게 된다. 그 때문에 일진회는 어느 곳에도 발 붙일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하며 [[조직]]은 와해될 [[위기]]에 놓인다. 더이상 한국에서는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이용구는 조직을 [[만주]]로 옮기고 만주를 개척하면서 살 계획을 세운다. 이에 이용구는 1909년 12월 일본 [[수상]]인 [[가쓰라 다로]]에게 한일합방 청원을 앞장서 추진할테니 만주 이주에 소요되는 비용 3백만엔을 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때 가쓰라 다로는 이용구에게 "합방에 힘써준다면 3백만이 아니라 3천만이라도 줄 수 있다."라고 [[약속]]한다. 이용구는 한일합방 전까지도 일본이 주장한 합방의 내용이 자신이 생각한 1:1 대등합방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용구는 이후 대한제국과 일본이 맺은 [[한일병합조약]]의 병합을 문제삼으며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이 원하는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이용구는 바로 토사구팽당한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하게 되자 그의 [[장례식]] 당일 독립관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해 왔다가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진회가 1주일의 시한을 받게 되는데 쉽게 말해 1주일 내에 [[해산]]하라는 것. 일본은 1910년 9월 일진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해산비 명목으로 달랑 15만엔을 던져주었다. 그것도 이용구 개인에게 준 게 아니라 일진회 회원들 전체에게 준 거니 토사구팽이 따로 없다. 결국 이용구는 자신이 토사구팽당했다는 사실에 허탈해하며 [[결핵]]에 몸져 눕게 된다. 1912년 죽기 직전 문안차 찾아온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친일|바보짓]]을 했어요. [[1904년|처음]]부터 [[사기|속았던 건 아니었을까요?]]"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 이용구: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 우치다 료헤이: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 정작 저 말을 전한 우치다 료헤이야말로 일진회의 고문이자 이토 히로부미의 [[참모]]였으며 일본의 [[대륙]] 진출을 음지에서 추진하던 대륙 [[낭인]]의 거두였다. 되도 않은 구라를 쳤을 확률이 높은 셈. [[아시아주의]] 항목 참조.] >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 『日本之亞細亞』''' 1911년 일본 스마(須磨) 지방[* 현 [[효고현]] [[고베시]] [[스마구]].]으로 건너가 [[요양]] 생활을 하게 되었다가 1912년 병고(病苦)로 죽었다. 죽은 후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勳) 1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아들인 이석규[* 1909년 이용구와 2번째 부인 [[이화사]](李華師)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본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大東碩奎, 大東國男, 佐藤國郞이다. 성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죽을 때까지 대동아 공영을 주장했다. 특히 大東國男는 '대동국의 남아'라는 뜻이다.][* 이석규를 낳기 전에 조카인 [[이현규]](李顯奎)를 양자로 두었으나 이석규를 [[늦둥이]]로 보고 바로 [[파양]]하였다.]도 친일파이자 일진회 고문 출신으로 아버지와 함께 이완용, 송병준을 위한 한일병합 공모자 합동 [[위령제]]를 지내는 등 친일 행위를 해 왔으며 [[광복]] 후에도 이용구 전기[* 이용구의 생애(李容九の生涯), 時事通新社, 1961.] 등을 [[저술]]하였다가 1986년 일본에서 사망했다. 이석규는 아버지 이용구가 평생 송병준의 농간 속에 [[이용]]만 당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나마 사망 직전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후회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면서 지금도 이용구의 이름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대표격으로 남아있다. == 여담 == ||<table align=center><tablewidth=250><tablebordercolor=#dddddd,#383b4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ile.newdaily.co.kr/1259040128.jpg|width=100%]]}}} || || 오른쪽의 인물. 왼쪽은 [[송병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동명의 독립운동가 [[이용구(독립운동가)|이용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한자]]명까지 똑같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조선귀족)] [[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경제, 사회]][[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종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친일단체]][[분류:1868년 출생]][[분류:1912년 사망]][[분류:상주시 출신 인물]][[분류:벽진 이씨]][[분류:교주]][[분류:조선의 천도교 신자]][[분류:일제강점기의 종교인]][[분류:제명된 종교인]][[분류:조선귀족 작위 거부자]][[분류:일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