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 align=right><table bordercolor=#000000><bgcolor=#fffff9> '''{{{+1 이시다 요시오[br] 石田芳夫 / Ishida Yoshio}}}''' || ||<-2> [[파일:이시다_요시오.jpg|width=300]] || ||<bgcolor=#000000> '''{{{#white 직업}}}''' ||<bgcolor=#fffff9> [[바둑기사]] || ||<bgcolor=#000000> ''' {{{#white 생년월일}}}''' ||<bgcolor=#fffff9> [[1948년]] [[8월 15일]] || ||<bgcolor=#000000> ''' {{{#white 국적}}}''' ||<bgcolor=#fffff9> [[파일:일본 국기.svg|width=28]] [[일본]] || ||<bgcolor=#000000> ''' {{{#white 소속}}}''' ||<bgcolor=#fffff9> [[일본기원]] || ||<bgcolor=#000000> ''' {{{#white 출신지}}}''' ||<bgcolor=#fffff9> [[아이치]]현 기요스시 || ||<bgcolor=#000000> ''' {{{#white 입단}}}''' ||<bgcolor=#fffff9> [[1963년]] || ||<bgcolor=#000000> ''' {{{#white 단급}}}''' ||<bgcolor=#fffff9> 九단 || [[파일:external/www.nihonkiin.or.jp/000007.jpg]] [목차] == 개요 == [[일본]]의 [[프로]] [[바둑]] [[기사(바둑)|기사]]. 계산과 형세판단에 능해 '''[[컴퓨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 상세 == [[기타니 미노루]]의 문하생으로, 3번째 도전 만에 14세의 나이로 프로에 입단했다. 1971년 [[혼인보전]]에서 [[린하이펑]]을 꺾고 당시 최연소 혼인보 타이틀 홀더가 되었으며, 이후 1975년까지 혼인보전 5연패를 달성했다.[* [[혼인보전]] 5연패 이상 혹은 10회 이상 획득한 기사는 은퇴 후 또는 60세 이상부터 '''명예 혼인보'''라고 자칭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데, 1998년에 혼인보전 10연패를 달성한 [[조치훈]]이, 그 공적을 인정받아 곧바로 '''25세 혼인보'''라고 자칭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면서, 혼인보전의 명예칭호 제도가 "○○세 혼인보" 칭호 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 덕분에 이시다 요시오도 60세가 된 2008년부터 '''24세 혼인보 슈호(本因坊秀芳)'''라고 자칭할 수 있게 되었다.] 1974년에는 [[명인전(일본)|명인]] 타이틀까지 획득해, 사상 3번째로 '''명인 혼인보'''가 되었다. 계산이 매우 정확해 [[이창호]]와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평까지 듣는다.[* 실제로 98년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후지쯔배]] 16강전에서 붙은 적이 있었고, 이창호 九단이 흑으로 4집 반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그 때보다 지금 바둑이 더 발전한 것은 감안해야겠지만... 이창호가 비록 두터움의 활용이나 부동심 등에서는 앞서나 이시다도 전성기의 계산력만큼은 이창호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이 있다. 이시다 요시오의 전성기 시절 별명은 [[컴퓨터]]였는데, 이 별명이 얼마나 어울리냐 하면 보통 프로기사들이 형세판단을 할 때는 현 상황에서 양쪽이 최선을 다했을 때(= 실수나 돌발상황이 없을 때) 내지는 평균적인 예측치를 적용하여 "흑이 4집 정도 유리하다."와 같은 형태로 대답한다. 그런데 이시다 요시오 九단은 [[확률분포]]의 개념을 적용하여(…) "백이 2와 2/3집 유리하다."와 같은 형태로 대답하곤 했다. 물론 정말 확률분포의 공식을 따라 계산한 것은 아니고, 발생 가능한 여러 가지 상황을 가능한 한 많이 머릿속에 그려서 종합했다는 이야기지만, 여하튼 이 이야기는 전통적인 바둑 강국 일본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바둑 스타일만 보아서는 굉장히 냉정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다정다감하고 팬서비스도 좋다고 한다. [[최철한]]과 더불어 기풍이 성격과 별 관계가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바둑으로 입증하고 있는 기사. 바둑계에서 세계대회가 생기기 훨씬 전에 전성기가 끝난 기사인지라 세계대회에서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세계대회 최고성적은 1991년과 1999년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후지쯔배]] 8강 진출. 1991년 후지쯔배에서는 중국의 첸위핑에 져서 4강 진출에 실패했고, 1999년 후지쯔배에서는 [[유창혁]]에게 져서 4강 진출에 실패했다. 2010년 후지쯔배 본선 1회전에서 [[목진석]]을 꺾어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그 후 2회전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2013년 3월 20일 UEC 우승, 준우승 바둑 프로그램과 맞붙은 제1회 전성전(電聖戦)에서 4점 [[접바둑]]으로 [[젠(바둑 프로그램)|젠]]에게 불계승, [[크레이지스톤]]에게 3집 패했다. 여담으로 재미있는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과거 初단 시절에 세계 최초의 '''[[국제전화]] 대국'''을 한 기사 중의 한 명이다. 상대는 역시 같은 初단이었던 [[조훈현]]. 결과는 이시다 요시오의 완승이었다고 한다. [[분류:바둑 기사]][[분류:1948년 출생]][[분류:1963년 데뷔]][[분류:키요스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