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align=center><tablewidth=100%><:><#4682B4>'''[[은언군|{{{#FAFAD2 은언궁의 역대 종주}}}]]''' || ||<width=30%><:> 1대[br][[은언군]][* 원래는 이복형 [[상계군]]이 아버지 은언군의 뒤를 이어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 {{{+1 ←}}} ||||<width=30%><#4682B4><:>'''{{{#FAFAD2 2대[br]이성득}}}'''[* 상계군 사후 은언군의 서자들 중에 최연장자였고 1812년까지 살아남은 은언군의 아들들 중에서는 그가 연장자였다. 당연히 제사도 그가 받들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서자에다가, 42세에 미혼으로 사망한 탓에 철종 즉위 후 군호를 받지 못했다.] || {{{+1 →}}} ||<width=30%><:> 3대[br][[익평군(1824)|익평군 이희]] || 李成得. 생몰기간: 1775년 ~ 1817년 11월 27일. [[조선]] 후기의 왕족, 평민.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로 생모는 미상이다. [[상계군]] 이담, 이창순, 이창덕의 이복 동생이자 [[풍계군]] 이당, [[전계대원군]] 이쾌득(이광)의 이복 형이다. [[은언군]]의 정실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 소생 아들 이창순과 이창덕[* 그의 이복 형들이다.]은 모두 일찍 죽었고 [[상계군]] 이담도 [[홍국영]]의 입양 사건으로 탄핵받다가 의문의 독살을 당했으므로 [[1812년]](순조 12) 당시 [[강화도]]에 유배된 이철득, [[풍계군|이당]], [[전계대원군|이쾌득]] 등 살아남은 [[은언군]]의 아들들 중에는 그가 최연장자였다. [[이쾌득]]은 [[전계대원군]] 이광으로 밝혀졌지만 [[1780년]]생 이철득은 1783년생인 풍계군과 출생년대가 맞지 않아 동일 인물로 보기 힘들다. 이철득이 성득의 동복 동생인지 이쾌득의 일찍 죽은 친형인지도 불분명하다. [[상계군]] 이담 사건과 관련되어 일가족이 [[강화도]]로 유배갈 때 따라 유배되었다. 간간히 보이는 기록 외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것은 미상이다. 철종 즉위 후 은언군, 상계군에 관련된 자료들을 대량으로 말소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한쪽 발과 한쪽 팔이 마비되었다는데 제때 진료를 받지 못했다. [[1817년]] [[11월 27일]] [[강화군/역사#s-8|강화부]] 관아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철종 즉위 후 [[은언군]], [[상계군]]과 관련된 자료들을 대량으로 세초, 인멸해버려서 그가 어떤 이유로 관아에서 고문을 받았는지는 알수 없다. 당시 43세였고 그는 미혼이었다. == 기타 == 그의 죽음을 계기로 [[순조]]는 [[풍계군|이당]], 이철득, [[이쾌득]] 등 그의 동생들의 석방을 고민하다가 [[1820년]]과 [[1822년]] 일시적으로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관례를 치루고 성인식을 했으며, 이당은 첩을 두고 서자를, 이쾌득은 이해동으로 바꿨다가 이광으로 이름을 바꾸고 장가를 간다.] 제일 늦게 석방된 인물은 이쾌득으로 1830년 석방되었다. 그가 [[은언군]]의 봉사손으로 정식 추대되지는 않았지만 [[은언군]]의 살아남은 자녀들 중에는 그가 최연장자였고 당연히 제사에 대한 권리는 조선시대 당시 법률상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철종(조선)|철종]] 즉위 후 철종이 은언군 가문 사람들에게 [[시호]]나 [[군호]], [[품계]]를 추증했지만 이성득은 제외당했고 봉사손도 지명받지 못했다. 그래서 은언군가의 후계는 이복형 [[상계군]]의 양자인 [[익평군]]이 이었고 이성득은 은언군가의 사손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분류:조선의 왕자]] [[분류:서출]] [[분류:은언궁 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