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다른 동명이인, rd1=이상화)] ||<-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7a0><tablewidth=45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이상화}}}'''[br]'''李相和'''}}}}}} || ||<-2> [[파일:attachment/Sanghwa.jpg|width=100%]]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아호'''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042137485&code=100100|#]]] || || '''본관''' ||[[경주 이씨]][* 39세 상(相) 항렬.] || ||<|2> '''출생''' ||[[1901년]] [[4월 5일]] ||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군]] 서상면 동산동[br](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서문로2가)[* [[http://naver.me/5mevg9uk|이상화시인 생가]]. 안채는 현재 라일락뜨락1956이라는 카페로 꾸며져 있다.] || ||<|2> '''사망''' ||[[1943년]] [[4월 25일]][* 공교롭게도 소설가 [[현진건]]과 같은 [[대구광역시|대구부]] 시내(현 [[중구(대구)|중구]])에서 태어나 같은 해의 같은 날에 사망했다. 거기다 두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 말기에 붓을 꺾고 끝까지 [[친일]]로 전향하지 않은 점에서 굉장히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 42세) || ||경상북도 대구부 명치정2정목[br](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대구)|계산동2가]] 84번지)[* [[http://naver.me/5aIjsgYC|이상화 고택]]으로 남아 있으며, 이상화시인 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이곳에 있다. 위 이상화시인 생가와는 다른 곳이다.] || || '''학력'''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 {{{-2 (중퇴)}}} || || '''주요작품''' ||〈[[나의 침실로]]〉^^(1923)^^[br]〈[[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attachment/20070321133119197236962.jpg]] || 좌측부터 차례로 이상화, [[권기옥]], [[이상정]] || [[대한민국]]의 [[시인(문학)|시인]],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파일:/image/001/2006/03/14/kp1_2060314g0769.jpg]] || [[대구광역시]] [[수성구]] [[수성유원지|수성못]]에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 시에 나오는 '들'의 실제 배경이 수성못 북쪽의 지금 지명으로, [[수성구]] 상동, 중동, 두산동, 황금동 일대에 있던 너른 들이었다. 상동, 중동, 두산동을 지나는 길 이름도 이상화의 이름을 딴 상화로이며, [[달서구]] 대곡동, 상인동에도 [[상화로]]가 있다.] || [[http://sanghwa.org/~menu2_2|이상화 주요 연보]] 이상화는 1901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동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2가)에서 아버지 이시우(李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독립운동가인 형 [[이상정]]이 있고, 아래로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인 [[이상백]]과 이상오(李相旿)가 있었다. 7살되던 [[1908년]]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14년]] 한문 수학을 마친 후 1년간 [[일본어]]·산술·박물 등의 신학문을 배우다가 이듬해인 1915년 상경하여 [[경성부]]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18년 자퇴하고 그해 7월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였다. 이때 그는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친구 백기만(白基萬) 등과 함께 [[계성고등학교(대구)|계성학교]]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3월 8일 서문 밖 장터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에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당시 모였던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미리 등사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거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 사전에 주동 인물들이 검속되자 [[경성부]] 박태원[* 소설가 [[박태원(소설가)|박태원]]과는 동명이인이다.]의 하숙으로 피신하여 투옥을 면했다. 같은 해 10월 이상화는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강권으로 [[공주시|공주군]] 출신의 [[달성 서씨]] 서순애(徐順愛)와 결혼하였다.[* 이상화는 이후 일본 도쿄에 유학을 갔다가 [[관동 대지진]] 때 귀국하여 한동안 서울 가회동에 살았는데, 이 시기 도쿄에서 만난 함흥 출신의 유학생 유보화와 동거했었다. 그러나 동거 2년여만인 1926년 폐병으로 그녀를 떠나보내게 되는데, 이 밖에도 도쿄 유학시절 여러 여인과 염문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안의 강요에 따라 원치 않는 결혼을 한 것에 대한 반발심이 컸던 모양이다.] 서순애는 공주 유지 서한보(徐漢輔)의 딸이었는데, 서한보는 1917년 1월 24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기념품을 기증하고[[http://db.history.go.kr/id/su_003_1917_01_24_0540|#]], 1918년 1월 30일에는 충청남도참사에 임명된 자[[http://db.history.go.kr/id/su_004_1918_01_30_0450|#]]로서, 다소 친일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독립운동가 집안과 친일 유지 집안의 결합이라하면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보일 수 있는데, [[강동원]]의 사례를 보면 그 당시엔 그런 사례가 그렇게 이상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외증조부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종만]]인 탓에 친일파 후손 논란이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외할머니는 독립유공자 [[노원필]]의 장손녀라는 사실. 즉, 독립운동가의 손녀가 친일파 집안에 시집을 갔다는 말이다.[[https://news.joins.com/article/21343411|#]]]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s-3|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나도향]]·홍사용·[[박종화]]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외국어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하였고, 1923년 3월 수료하였다. 같은 해「[[나의 침실로]]」를 발표했는데, 그해 9월에 일어난 관동 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 대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이듬해 3월 귀국하였으며, 경성부 [[가회동]]에 있는 취운정(翠雲亭)[* [[http://naver.me/xXNYta2e|현재도 남아있다]].]에 머물면서 시 짓기에만 전념했다. 1924년 고향 친구 박태원이 죽자, 그를 추모하는「이중의 사망」이라는 시를 지었고, 같은 해 [[김기진]] 등과 무산계급 문예운동단체인 '파스큘라'를 결성하였다. 1925년 천도교기념관에서 '파스큘라'가 개최한 문예강연 및 시낭독회에 출연하여 시 「이별을 하느니」를 낭독하였고, 같은 해 8월 [[박영희]]·김기진 등과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시경향은 퇴폐주의에 해당하는 편이었는데, 1926년 잡지 <개벽>에 대표작「[[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으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 이 시기, 카프 기관지 <문예운동>의 주간이 되어 「조선병」, 「겨울마음」, 「지구 흑점의 노래」, 「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론」 등의 시와 논저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8년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부 간사로 있던 중,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공갈미수 혐의로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그해 8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으며[[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36&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9629&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곧 구류취소 처분을 받아 출옥하였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2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2628&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 이 시기 그는 서문로에 있던 자택 사랑방을 '담교장(談交莊)'이라 칭했는데, 수많은 항일독립운동 인사들이 출입하곤 했다. 1930년 잡지 별건곤에「대구행진곡」을 발표하였고, 1932년 자신의 생가이기도 한 서문로 자택을 처분하고 서천대천정(현 중구 장관동 50번지)로 이사하였다. 1933년 8월, 경상북도지사로부터 [[대륜고등학교|교남학교]] 강사 인가를 받고 근무를 시작했으며, 본 학교에서 조선어와 [[영어]], 작문, [[권투]] 등을 가르쳤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한편, 이 시기「반딧불」과「농촌의 집」에 이어 두 번째 창작소설 「초동(初冬)」을 발표하였다. 1934년 친구들의 권유로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했으나 사업에 실패하였고, 대구부 남성정(현 중구 [[남성로(대구)|남성로]] 35번지)으로 이사하였다. 1935년 잡지 <시원>에 시 「역천」을, <조강>에「나는 해를 먹다」를 발표하였고, 그해 큰아버지인 이일우가 별세하였다. 1936년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베이징]]·[[상하이]] 등지를 3개월간 유람한 후 귀국하였다. 이때 형과 조국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했었는데, 귀국 후 이듬해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2개월간 구금당하며 심한 고문을 받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그해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하였고[* 현재도 [[대륜고등학교]]에서 그가 작사한 교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경정2정목(현 중구 [[종로2가(대구)|종로2가]] 72번지)으로 이주하였다. 1939년 6월 명치정2정목(현 중구 [[계산동(대구)|계산동2가]] 84번지)로 이사하였고, 교남학교 교가 가사 문제로 가택 수색을 당하여 자신의 시 원고를 비롯해 1929년 별세한 친구 [[이장희(시인)|이장희]]의 유고까지 압수당하였다. 1940년 [[김소운]]이 번역한 『조선시집』에 「나의 침실로」 등 3편이 수록되었으며, 1941년에는 잡지 <문장>에 시 「서러운 해조」를 발표하였다.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명치정2정목의 자택에서 부인과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슬하에 세 아들 용희(龍熙) 충희(忠熙) 태희(太熙)를 두었다. == 여담 == [[http://tour.daegu.go.kr/kor/see/spot/history/__icsFiles/artimage/2010/12/03/kk111/201012031103541_WKXKF1JM.jpg]] *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건데, 그의 [[무덤]]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산 13-1번지에 있다. [[대구 도시철도 1호선]] [[대곡역(대구)|대곡역]] 3번 출구에서 200m 정도 올라가거나 [[대곡역(대구)#s-4|대곡역 항목의 환승 가능한 시내버스 문단에 있는 버스]]들을 타고 대곡역 정류장에서 하차 후 10분 정도 걸으면 동쪽에 야산이 있다. 조금만 올라가면 월성 이씨 재실과 제각이 보이고 바로 뒷편으로 문중 묘소가 있다. 이 곳에 이상화를 포함해 이상화의 아버지 이시우, 큰아버지 이일우, 형 이상정, 동생 이상백의 무덤이 있다. 또한 [[대구 버스 달서3|달서3번]]이나 [[대구 버스 달서5|달서5번]]을 타고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에서 내려서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 뒷산을 타고 올라가도 나온다. 참고로 달서3번은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 정문에, 달서5번은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 후문에 정차한다. 아니면 [[대구 버스 836|836번]], [[대구 버스 달서1|달서1번]], [[대구 버스 달서4|달서4(-1)번]], [[대구 버스 성서1|성서1(-1)번]], [[대구 버스 급행7|급행7번]]을 타고 유천교 정류장에서 하차 후 1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온다. *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오거리 인근에 [[매일신문]]사와 [[계산성당]] 뒷편, 계산성당에서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까지 이르는 골목길이 대구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대구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곳이 이 골목이기 때문이다. 당시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 [[계성고등학교(대구)|계성학교]], [[신명고등학교|신명학교]] 학생들이 이 곳에서 3월 8일날 만세 운동을 시작한 곳이다. 대구광역시에서 근대골목체험 코스로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이 포함되어 있다. * 고택에 비하여 생가터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성로의 대구산업공구골목 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그 생가터 일부를 매입하여 '''라일락뜨락'''이란 카페가 지어져 있으며, 이 카페는 이상화 시인의 홍보를 겸하고 있다. [[http://lilacgarden1956.7x7.kr/|홈페이지]] [[http://www.senior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5591|신문기사]] [[https://blog.naver.com/diamonds8/221608076154]] * [[일본]]에 쫓기느라 자택에 오는 날이 되게 드물었다고 한다. * 대구 [[동대구로]] [[수성구민운동장역]] 근처의 아파트인 궁전맨션에는 이상화의 벽화가 [[이육사]], [[서상돈]]과 함께 그려져 있다. == 관련 문서 == * [[작가/목록]]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한국 남성 작가]][[분류:경주 이씨]][[분류:중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901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