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31년 출생]][[분류:1987년 사망]][[분류:남해군 출신 인물]][[분류:장수 이씨]][[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ㅇ]][[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ㅇ]][[분류:색소포니스트]][[분류:진주고등학교 출신]][[분류:한양대학교 출신]] ||||<table align=right><-5> [[파일:/pds/200906/05/40/b0065940_4a28e00589d3e.jpg]] || || 이름 ||이봉조(李鳳祚)|| || 본관 ||[[이(성씨)|장수 이씨]][[http://asianews.seesaa.net/article/462633085.html|#]] || ||<|2> 출생 ||[[1931년]] [[5월 1일]]||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0406|#]]|| || 사망 ||[[1987년]] [[8월 31일]], [[서울특별시]]|| || 가족 ||[[배우자|첫번째 부인]] 노전숙, [[내연녀]] [[현미(가수)|현미]]|| || 자녀 ||[[자식|슬하]] 3남 3녀[* 1남 3녀는 노전숙 소생, 2남은 현미 소생.]|| || 학력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졸업]]|| || 종교 ||[[개신교]]|| [목차] == 소개 == [[대한민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작사가]], [[작곡가]]이다. == 생애 == [[1931년]] [[5월 1일]],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은 [[진주시]]에서 자랐는데, 일찌감치 [[미국]] [[재즈]]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대한 흥미를 키워 갔다고 한다. [[진주고등학교|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시절, 친구의 권유로 [[미8군]]에서 음악 활동을 하게 됐다. 거기서 [[재즈]] [[색소폰]]을 연주했는데 뛰어난 실력을 인정 받으며 전국에서 공연을 갖게 되었다. 이후 [[서울특별시청]] 토목과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미8군 무대에서 재즈 색소폰을 연주했다. 당시 유명 색소포니스트인 엄토미[* [[엄앵란]]의 작은아버지.]의 제자로서 인정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재즈]]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내연녀였던 [[현미(가수)|현미]]와 함께 수많은 명작을 내놓으며 명성을 떨쳤다. 애초에 1957년 현미의 미 8군 무대 데뷔곡이었던 '아 목동아!'를 번안 편곡한 사람이 이봉조였다. 1962년 현미의 1집 앨범인 '밤안개'가 공전 히트를 기록하면서 파트너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그밖에도 [[정훈희]], [[윤복희]], [[김추자]] 같은 유명 가수들을 발굴하며 스타 작곡가로서 맹활약하였다. 1963년,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가정교사'. 그리고 이듬해엔 영화음악 연출가로서도 데뷔하였으며, 1967년에는 영화음악 연주감독으로 데뷔했다. 훗날 여러 국제가요제에서도 작곡가로서 본인의 이름을 알렸다. 본처인 노전숙과 자녀들이 모두 [[개신교]] 신자여서인지 색소폰 연주곡 CCM 음반도 다수 출판했다. 보통 [[작곡가]]들은 즉흥곡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봉조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맨발의 청춘#s-1|맨발의 청춘]]이 그랬다. 촬영 기간이 18일에 불과했기에 작곡할 시간이 워낙 없었는데, 이봉조가 촬영 화면을 보고 녹음실에서 색소폰으로 몇번 ‘빠앙빠앙’ 불다가 주제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게다가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신정]] 때 친필로 써 보낸 그의 카드는 작품 수준으로 평가 받았다. === 결혼 생활 === 노전숙과 열애 끝에 [[결혼]]했으며 [[자식|슬하]]에 1남 3녀를 두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 본부인 몰래 [[가수]] [[현미(가수)|현미]]를 만나 동거하게 된다. 이후 현미가 두 아들을 낳을 때까지 본부인인 노전숙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현미의 첫째 아들과 노전숙의 셋째 아들이 [[동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간통|외도]]가 들통나면서 [[가정|가정 파탄]]에 이를 지경이 되었다. 사실 60년대에는 비교적 종종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이혼사유 1위(그것도 매우 압도적이었다)가 부정행위 또는 두집 살림인것을 보면... 또한 당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 적령기 남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고 사회 전체적으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남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여자들이 후처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본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현미측의 요구로 사실혼 관계가 15년만에 끝이 났다. 절친이었던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중재로 큰 분쟁으로까진 발전하진 않았지만, 이후 부인이 있는 본가로 들어가지 않고 쭉 홀로 살다가 1987년 8월 31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사망 직전에 현미와 재회해서 다시 합치기로 했으나 그 전에 고독사했다. 재회 당시 비참한 모습을 보고 현미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틀니를 끼고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본부인인 노전숙 사이에서 낳은 4남매는 모두 훌륭히 성장하였다. 다들 명문대를 졸업하였고 외모도 출중하다. 아들 이영대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재학중인 22세에 제26회 사법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한 뒤 하버드대 로스쿨 유학을 걸쳐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 현재는 서초동 소재 법무법인 수호의 대표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게다가 광고도 찍을 정도로 미남이다. 이화여대 출신 엘리트인 노전숙처럼 딸들도 명문 이화여대, 숙명여대를 졸업해 의사, 교수, 대기업 임원과 결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