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 ||<-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7a0><tablewidth=45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이병기}}}'''[br]'''李秉岐'''}}}}}} || ||<-2> [[파일:/image/020/2013/01/21/52459491.1_59_20130121031811.jpg|width=100%]]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가람(嘉藍) || || '''본관''' ||[[연안 이씨]][* 소부감판사공파 25세 영(榮) '''병(秉)''' 항렬. 아버지 이채(李倸)는 24세 승(承) '''人변(외자)''' 항렬.][[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45&docId=542012&categoryId=46645|#]] || ||<|2> '''출생''' ||[[1891년]] [[3월 5일]] || ||[[전라도]] 여산도호부 천서면 진사리[br](현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진사마을)[* 출생지인 원수리 573번지에 그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0942&docId=1193960&categoryId=33080|#]]] || ||<|2> '''사망''' ||[[1968년]] [[11월 29일]] (향년 77세) || ||전라북도 [[익산시|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진사마을 || || '''묘소'''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선영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국문학자, [[시인(문학)|시인]], 교육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이병기는 1891년 3월 5일 전라도 여산도호부 천서면 진사리(현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진사마을)에서 변호사 이채(李倸)[* 대한제국·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한 여산 지역의 유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909년 1월 호남학회 전북지회 여산 임원으로 찬성회에서 학회 후원 및 전북 지방 교육문제에 대한 연설회를 가졌으며, 같은 해 2월 전라북도 시찰위원으로 각 학교 시찰 및 의연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http://db.history.go.kr/id/kn_053_0040_0020|#]]. 1922년 6월 여산금융조합(礪山金融組合) 감사로 선출되어 취임하였다[[http://db.history.go.kr/id/gb_1922_06_01_a29390_0390|#]].]의 1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졸업 후 1913년 [[경기도]] 남양공립보통학교 훈도에 발령된 것을 시작으로 1914년~1917년 전주제2공립보통학교(현 전주완산초등학교) 훈도, 1918년~1919년 여산공립보통학교 훈도 등 교사생활을 하였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당시 수집한 책들은 나중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가 설치되는 계기가 된다. 1921년 12월 서울 [[휘문고등학교|휘문의숙]]에서 [[김윤경(1894)|김윤경]]·[[최현배]]·[[최두선]] 등 16명의 유지와 함께 [[한글학회|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고 간사가 되었다. 1922년부터는 [[보성고등학교(서울)|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때부터 시조 연구에 주력했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8.15 광복]] 후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재직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이후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그러다가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식에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서울)|계동]] 인근에서 [[뇌일혈]]로 갑작스럽게 쓰러졌고[[https://news.joins.com/article/1180683|#]], 이후 10여 년 간 투병생활을 지속하다가 1968년 11월 29일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https://news.joins.com/article/1180648|#]] 평생을 [[시조(문학)|시조]] 혁신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으로 [[수필]]도 많이 남겼다. 그의 시조를 이수인이 가곡하여 노래로 만든 [[별(동음이의어)#s-16.3|별]]이 있는데 현재까지도 교과서에 실리는 등 인기가 있는 [[가곡]]이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익산시 출신 인물]][[분류:연안 이씨]][[분류:1891년 출생]][[분류:1968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