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鎬 Abbot Placidus Lee Dong-ho 1935년 ~ 2006년 [[파일:external/www.cbck.or.kr/abbas2.jpg|height=299]] ||||||||||||<table align=center> [[베네딕토회|역대 천주교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장]] || || 2대 이성도 티모테오 몬시뇰 ||←|| '''3대 이동호 플라치도 아빠스''' ||→|| 4대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 || ||||||||||||<table align=center> [[천주교 함흥교구|역대 천주교 함흥교구장 서리]] || || 2대 이성도 티모테오 몬시뇰 ||←|| '''3대 이동호 플라치도 아빠스''' ||→|| 4대 [[장익(주교)|장익]] 십자가의 요한 주교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제3대 [[http://www.osb.or.kr|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장]] 겸 덕원자치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 [[세례명]]은 '플라치도'이다. 만주 간도 연길현 팔도구에서 출생한 이동호 [[아빠스]]는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서울 가톨릭대학]]을 졸업한 뒤 성 [[베네딕토회]] 왜관수도원에 입회, 왜관본당 보좌[[신부(종교)|신부]]와 성주본당 보좌신부·구미본당 주임신부 등을 거쳐 1969년 9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본원장으로 임명된 후 1971년 4월 15일 비교적 젊은 나이인 36살에 왜관수도원 제3대 [[아빠스]]로 선출돼 [[한국인]] 최초의 아빠스가 되었다.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지 62년만의 일이었다. 이것은 당시 [[한국 천주교]]의 상황에서 외국서 설립된 [[수도회]]들 중 최초로 방인 장상을 갖게 되는 사건이었으며 수도회 내적으로는 한국인이 국제적 공동체에서 동등하게 대접받게 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독일인]] 아빠스가 물러나고 한국인 장상이 출현하게 된 배경은 당시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과도 관계가 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릿고개]]라는 용어가 없어지고 [[새마을운동]] 등 영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경제적인 성장을 거두며 전반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시점이었다. 또한 교회적으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현지 교회의 정신적 사회적 발전에 적응할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그 의미대로 이동호 아빠스는 이전의 [[수도원]] 사업들을 계속해서 성실히 발전시켜 나갔으며 자립 수도원을 목적으로 했던 부산 수도원을 분원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분도출판사]] 분도인쇄소를 분리 확장시켜 교회 출판사업을 진작시켰고 연화리 결핵요양원을 설립하는 한편 순심중ㆍ고등학교를 확장하고 농장사업을 시작 발전시키는 일도 추진했다. 한국인에 의한 베네딕도회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는 시기였다. 2006년 11월 18일 향년 71세로 선종했다. [[분류:가톨릭 수도사제]][[분류:베네딕토회 수도자]][[분류:1935년 출생]][[분류:2006년 사망]][[분류:천주교 함흥교구장]][[분류:가톨릭대학교 출신]][[분류:천주교 덕원자치수도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