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 align=center> [[파일:external/timetree.zumst.com/d21e5709a10b47f9bc08d4327f053051.png]] || || '''이름''' || 이동석 (李東錫) || || '''생년월일''' || [[1964년]] [[1월 11일]] ([age(1964-01-11)]세)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신지''' || [[전라북도]] [[군산시]] || || '''출신학교''' ||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 - [[동국대학교|동국대]] || || '''포지션''' || [[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1987년/신인드래프트|1987년 2차 1라운드 1순위]]([[빙그레 이글스]]) || || '''소속팀''' || [[빙그레 이글스]](1987~1991)[br][[쌍방울 레이더스]](1992~1993) [[세한대학교]](2013~) 야구부 감독 || [목차] == 개요 ==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4번째 [[노히트 노런]] 기록 투수''' 前 [[빙그레 이글스]], [[쌍방울 레이더스]]의 야구 선수. == 선수 시절 ==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 재학 당시 촉망받던 투수 유망주 중 한 명이었다. 다만 1년 후배인 당시 군산상고 에이스 [[조계현]]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조계현이 선발로 나서는 날에 이동석이 구원으로 나오거나 반대로 이동석이 선발로 나오고 조계현이 이어 던지는 경기가 종종 있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82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결승전 1차전이다.[* 원래 결승전은 단판제지만 첫 경기에서 연장 12회 무승부를 기록하자 다음날 2차전(재경기)이 연이어 열렸다.] 결승전 첫 경기 선발이 이동석이었고 3회부터 조계현이 이어던졌다. 그러나 이후 추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영향인지 당시 연고팀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지 못했고 1987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했다. 데뷔 첫 해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프로 2년째인 1988년에 야구계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 해 4월 17일 [[빙그레 이글스|빙그레]]와 [[해태 타이거즈|해태]]의 맞대결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1:0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것도 당대 최강이었던 ~~각동님~~ '''[[선동열]]'''과 선발 맞대결을 벌여서.[* 이보다 앞서 OB 장호연이 1988년 롯데와의 원정 개막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여 1988년 시즌에만 두 번의 노히트 노런이 나오는 진기록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당시 이동석의 상대였던 선동열도 이듬해인 1989년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더 대단한 것은 출루 2개가 수비 실책인 무사사구 노히트 노런이었다는 점이다. [* 수비실책들만 아니었으면 KBO 최초로 퍼펙트게임이 가능했었다.] 그 해 빙그레는 [[이상군]], [[한희민]] 등의 원조 빙그레 에이스와 새로운 신성 이동석, [[장종훈]], [[이정훈(1963)|이정훈]] 등의 활약에 힘입어 창단 3년만에 [[1988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된다. 이 해 이동석의 성적은 [[평균자책점]] 3.67 7승 3패 2세이브. 빙그레 vs 해태의 [[1988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선동열]]과 [[이상군]], [[한희민]]을 피하게 하기 위한 [[김영덕]] 감독의 작전으로 또 다시 [[선동열]]과 맞대결하게 된 이동석은 [[이순철]]에게 솔로 홈런 1방만 맞으며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문제는 상대가 '''[[선동열]]'''이라는 것. 결국 패전의 멍에를 썼다. 이동석은 빙그레가 3패 후 2연승으로 맞이한 [[1988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해 해태의 강타선을 겨우겨우 막다가 4회 초에 안타를 맞고 [[김대중(야구)|김대중]]으로 교체되어 패전 투수는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빙그레는 해태에게 패배했다. ~~이 때부터 콩그레의 전설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다음 시즌이 기대되는 신인으로 촉망받았으나, 그 이후 코치와 감독 등의 불화와 구위 저하로 출장 기회는 점점 줄어갔고, 결국 1992년 4월 10일 [[쌍방울 레이더스]]에 현금 트레이드됐다.(당시 트레이드 머니는 2,250만 원) 그러나 쌍방울에서도 별다른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 채 1993년 시즌 후 은퇴하게 된다. 통산 기록은 [[평균자책점]] 5.01, 12승 16패 7세이브. == 은퇴 이후 == 지도자로 변신했으며 [[설악고등학교 야구부|속초상고]]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2004년 [[화순고등학교 야구부|화순고]] 감독으로 부임하여 2004년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미추홀기]] 준우승, 2006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대통령배]] 4강, 2007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청룡기]]와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대붕기]] 16강 등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2013년부터 [[세한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으로 재직했다.[* 종전 감독은 [[청주고등학교 야구부|청주고]] 감독을 지냈고, 역시 빙그레에서 투수로 활동했던 [[장정순]]이었다.] 아쉬움이 많았을 선수 시절에 비하면, 지도자로서는 모범적인 길을 걷고 있는 듯. 2019년을 끝으로 사임했다. == 기타 == 선수 시절 경기에 내보내주지 않는다고 감독과 코치들과 불화가 많아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투수 치고 선수 생명이 길지 못했다. 당연하겠지만, 선수 시절 최고의 순간이었던 [[노히트 노런]] 당시의 공을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노히트 노런 당시 신었던 양말을 그 이후로도 계속 신었으며, 구멍이 나서도 계속 신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 양말은 원래 '''[[이상군]]의 것'''이었다고 한다.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감독]][[분류:군산시 출신 인물]][[분류:1964년 출생]][[분류:KBO 리그의 노히트 노런 달성자]][[분류:투수]][[분류:우완 투수]][[분류:우투우타]][[분류:군산상업고등학교 출신]][[분류:동국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