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宜寧南氏家傳畵帖. [[조선시대]] [[남(성씨)|의령 남씨]](宜寧南氏) 가문에서 [[태조(조선)|태조]], [[중종(조선)|중종]], [[명종(조선)|명종]], [[선조(조선)|선조]], [[영조]] 년간에 있었던 국가 행사를 그림으로 그려 남겨놓은 가전화첩. 현재 [[홍익대학교]] 박물관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홍익 대학교본이 [[서울특별시]] 시도 유형 문화재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내용 == 가전화첩이란 조선시대에 국가적인 차원의 각종 행사나 의례를 치룬 뒤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왕의 명령 또는 당시 참석했던 관원들의 발의에 의해 당시 행사 장면을 화폭에 담아 대대로 전승 보관케 한 것이다. 의령남씨가전화첩은 의령남씨 가문이 태조, 중종, 명종, 선조, 영조년간에 있었던 국가 행사를 그림으로 남긴 것으로,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葱臺試藝圖),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의 5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대 인터넷 상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의 [[경복궁]]을 묘사한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가 가장 유명하다. ==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 [[파일:태조망우령가행도1.png]] [[파일:태조망우령가행도2.jpg|width=700]]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장지]](葬地)를 신하들과 함께 돌아보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당시 의령 남씨 관리였던 남재(南在, 1351년 ~ 1419년)가 자신의 장지를 태조(太祖)의 수릉(壽陵)으로 헌상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겨 이를 기념하는 그림을 제작한 것이다. 태조가 한창 자신의 능지를 물색하던 1395년 ~ 1396년 사이에 그려진 것이며, 현대의 [[건원릉]] 지역을 묘사한 것이다. * [[http://cafe.naver.com/museumstudy/10486|태조망우령가행도 해제]] ==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 [[파일:중묘조서연관사연도1.jpg|width=700]] [[파일:중묘조서연관사연도2.jpg|width=700]] 조선 중종이 1535년에 [[인종(조선)|왕세자]]가 [[춘추]](春秋)를 떼자, 이에 교육에 힘쓴 서연관 39명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서 베풀었던 연회 장면을 그린 것이다. 네티즌들 사이에선 의령남씨가전화첩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하다. 당시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었던 의령 남씨 남세건(南世健, 1484년 ~ 1552년)의 주도하에 그렸다. 한국의 궁중 행사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며, 임난으로 완전 소실되기 이전의 구(舊)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을 가장 정밀하게 보여주는 자료로 인정받는다. 당시 경복궁은 중층으로 된 문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단,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512018_002|중종실록 1520년(중종 15년) 기사]]에는 근정전이 청기와로 이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표현되지 않은 것은 미스터리하다. * [[http://kids.hankooki.com/lpage/culture/201511/kd20151110153632136190.htm|[옛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림으로 만나는 조선]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1535년)]] * [[http://cafe.naver.com/historygall/66977|조선 전기 경복궁의 모습을 그린 회화]] * [[http://archive.hansik.org/contents_list/visualmaterials/item/contents_visual__work_type/372/1589/|한식 아카이브 :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51351&cid=46702&categoryId=46739|네이버 지식 백과 미술 작품 :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33426&cid=49295&categoryId=49295|문화 원형 백과 풍속화 : 중묘조서연관사연도]]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68950&cid=46702&categoryId=46739|한국 데이터 진흥원 : 의령남씨전가경완도 - 중묘조서연관사연도]] ==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葱臺試藝圖) == [[파일:명묘조서총대시예도.jpg|width=700]] 조선 명종이 서총대에서 거행한 문무시예(文武試藝)를 그린 것으로, 당시 의령 남씨였던 남응운(南應雲, 1509년 ~ 1587년)이 백마와 흑마를 하사받은 장면을 그려 남기게 한 것이다. ==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 [[파일:선묘조제재경수연도1.jpg|width=700]] [[파일:선묘조제재경수연도2.jpg|width=700]] [[파일:선묘조제재경수연도3.jpg|width=700]] [[파일:선묘조제재경수연도4.jpg|width=700]] [[파일:선묘조제재경수연도5.jpg|width=700]] 총 5면으로 이루어진 그림으로, 1605년([[선조(조선)|선조]] 38년) 4월에 의령 남씨 남이신(南以信, 1562년 - 1608년)을 포함한 13명의 관리들이 각자 70세 이상의 노모를 모시고 삼청동 공해(公廨)에서 벌였던 경수연을 다섯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것이다. ==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 [[파일:영묘조구궐진작도.jpg|width=700]] 1767년 12월 16일에 조선 영조가 [[경복궁]] [[근정전]] 옛 터에서 백관들에게 소작(小酌)을 받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당시 우참찬(右參贊)이었던 의령 남씨 남태회(南泰會, 1706년 - 1770년)의 주도하에 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탄 후에도 그 터가 그냥 방치된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자료가 된다.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2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1,03820000,11&pageNo=5_2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의령남씨가전화첩 (宜寧南氏家傳畵帖)]] >태조 년간(1392년 ~ 1398년)부터 중종 년간(1506년 ~ 1544년), 명종 년간(1545년 ~ 1567년), 선조 년간(1567년 ~ 1608년), 영조 년간(1724년 ~ 1776년)에 있었던 특정 사건이나 행사에 의령 남씨 출신이 관련되면서, 이를 기념하는 그림과 관련 기록을 묶어,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葱臺試藝圖),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등 5개의 개별 화첩으로 꾸민 것이다. > >의령 남씨인 남재, 남세건, 남응운, 남이신, 남태회 등이 각각 참여했던 행사의 시기와, 현존하는 <태조망우령가행도>를 비롯해 <중묘조서연관사연도>, <명묘조서총대시예도>, <선묘조제재경수연도>, <영묘조구궐진작도>의 제작시기는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 >하지만 의령 남씨 가문의 인물이 조선 왕실과 관련한 특정 행사에 직접 참여했던 사실이 관련 기록과 행사 장면을 묘사한 화책으로, 일괄로 현전하고 있다는 점과 현존하는 유사한 사례의 작품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회화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분류:대한민국의 시도유형문화재]] [[분류:조선의 회화]] [[분류:의령 남씨]] [[분류: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품]] [[분류: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