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width=100%><tablebordercolor=#e3ba62><tablebgcolor=#ffffff,#1f2023><-7>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대한제국|[[파일:대한제국 국장.png|width=35]][br]{{{#b22222 '''대한제국의 연호'''}}}]]}}} || ||<rowbgcolor=#b22222><-2> [[고종(대한제국)|{{{#e3ba62 '''고종 태황제'''}}}]] ||<-3> [[순종(대한제국)|{{{#e3ba62 '''순종 효황제'''}}}]] ||<-2><bgcolor=#000000> [[일제강점기|{{{#ffffff '''일제강점기'''}}}]] || ||<width=30%> [[광무|{{{#!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5px; background: #e3ba62; border-radius: 3px; color: #b22222" '''光武'''}}}[br]{{{-1 '''광무'''}}}]][br]{{{-2 1897~1907}}} ||<-2><width=5%> → ||<width=30%><bgcolor=#e3ba62>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5px; background: #b22222; border-radius: 3px; color: #e3ba62; font-size: 1.2em" '''隆熙'''}}}[br]{{{#b22222 '''{{{#!wiki style="font-size: 1.1em" 융희}}}{{{-2 1907~1910}}}'''}}} ||<-2><width=5%> → ||<width=30%> [[메이지 시대|{{{#!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5px; background: #be0026; border-radius: 3px; color: #c0a73f" '''明治'''}}}[br]{{{-1 '''명치'''}}}]][br]{{{-2 1910~1912}}} || [목차] == 개요 == [[대한제국]]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연호]]. [[1907년]] [[8월 3일]]에 발간된 대한제국 관보 3835호부터 사용되었고,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 상세 == [[1907년]] [[8월 2일]] 당시 [[내각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이(...) 내각을 대표하여 연호 후보로 '융희(隆熙)'와 '태시(太始)' 2개를 상주하였고,[* 당연히 이완용이 단독으로 연호를 지은 것은 아니고 내각에서 상의하여 정한 것이다. 직전 연호인 [[광무]] 또한 의정부에서 논의하여 올린 후보 중에 고종이 골랐다.] 순종이 이 중에 융희를 고름으로써 새 연호가 결정되었다. 원래 중국과 한국에서 따르던 [[유교]] 예법에 따르면 정변이나 반정 등 비정상적 황위 계승이 아닌 경우에는 [[연호#s-3|유년칭원법]]에 따라 즉위년 다음 해에 개원(改元)하는 것이 전통이므로,[* 이렇게 새 군주가 즉위한 다음 해 1월 1일부터 연호를 교체하는 것은 선대 군주의 통치 시대를 존중한다는 효 사상의 반영이기도 하고, 같은 해에 연호 2개가 공존하여 나타날 수 있는 혼란 역시 방지한다는 측면도 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즉위년칭원법을 따라 새로운 [[천황]]이 즉위한 그 해에 개원한다.] 정상적으로는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908년]]이 융희 원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엄연히 황태자가 예정대로 황위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년칭원법이 아닌 즉위년칭원법을 택해 순종이 즉위한 바로 그 해인 1907년을 융희 원년으로 정했다. 융희 개원이 전통적인 예법을 따르지 않은 이유는 크게 2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삼아 [[고종(대한제국)|고종]]을 강제로 불명예스럽게 퇴위시켜 정상적인 황위 계승이 되지 못한 탓도 있고, 둘째로 당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에 따라 이미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였으므로 일본식으로 즉위년칭원법을 따른 측면도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이후부터 대한제국 내에서는 일본의 [[메이지 시대|메이지]](明治)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국기를 게양하더라도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게양하였다. 순종 시절에 이미 대한제국이 껍데기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사례. == 기타 == * [[1908년]] [[부산]] ~ [[신의주]] 간 최초의 특급 열차 이름이 이 연호를 딴 '융희호'였다.[[http://m.blog.daum.net/hjs650225/12802988|신의주 ~ 부산 간 14시간 30분이 걸렸다.]] * [[2016년]] 말,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newskey=20161226.010090726530001&mode=newsView|1926년을 '융희 20년'으로 표기]]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일제의 통치를 거부한다는 뜻을 연호로써 드러낸 것인데 이런 행동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다. --지린다-- == 연보 == * 융희 원년 - [[1907년]](8월 3일부터) * 융희 2년 - [[1908년]] * 융희 3년 - [[1909년]] * 융희 4년 - [[1910년]](8월 29일까지) * [[경술국치]] [[분류:대한제국]][[분류: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