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네덜란드 여왕]][[분류:오라녜나사우 가문]][[분류:퇴위한 군주]][[분류:헤이그 출신 인물]][[분류:1909년 출생]][[분류:2004년 사망]] [[분류:지폐의 인물]][[분류:델프트 신교회 안장자]] [include(틀:역대 네덜란드 국왕)] ||||<#B3A7DC> '''{{{+1 Koningin Juliana }}}''' || ||<-2><table align=center><tablewidth=500><table bordercolor=#5D346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rinses_Juliana_1981.jpg|width=100%]]}}} || ||<#B3A7DC> '''이름''' ||율리아나 루이세 엠마 마리 빌헬미나[br](Juliana Louise Emma Marie Wilhelmina)|| ||<#B3A7DC> '''출생''' ||[[1909년]] [[4월 30일]][br][[네덜란드]] [[헤이그]] 누르데인데 궁전|| ||<#B3A7DC> '''사망''' ||[[2004년]] [[3월 20일]] (94세)[br][[네덜란드]] 바른 수스트데이크 궁전|| ||<#B3A7DC> '''장례식''' ||[[2004년]] [[3월 30일]][br][[네덜란드]] [[델프트 신교회]]|| ||<#B3A7DC><|2> '''재위''' ||<#E7E7E7>[[네덜란드]]의 여왕|| ||[[1948년]] [[9월 4일]] ~ [[1980년]] [[4월 30일]]|| ||<#B3A7DC> '''배우자''' ||리페비스터펠트의 공자 베른하르트 ,,(1937년 결혼),,|| ||<#B3A7DC> '''자녀''' ||[[베아트릭스 여왕]], 이레네, 마르가레트, 크리스티나|| ||<#B3A7DC> '''아버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하인리히|| ||<#B3A7DC> '''어머니''' ||[[빌헬미나 여왕]]|| [목차] == 소개 == [[네덜란드]] 제5대 국왕.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가 [[유산(의학)|유산]]을 두 번이나 하고 오빠를 사산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1937년]] 2살 연하의 [[귀족]] 출신 [[리페]]의 베른하르트와 결혼하여 4명의 딸을 낳았다. 다만 베른하르트는 결혼 생활 도중에 외도를 하여 사생아 2명을 두었다. 독일이 침공하자 율리아나 공주 일가는 만일을 위해 [[영국]]에 있던 빌헬미나 여왕과 떨어져 [[캐나다]]로 피난했다. == 치세 == [[1948년]] [[9월 4일]] 어머니 빌헬미나에게 양위받아 네덜란드의 여왕이 되었고, [[1949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1953년]] [[1월 31일]] [[북해]]에서 대홍수가 일어나 1,836명이 사망하는 재앙이 일어나자 사태 수습에 진력했다. 본인도 [[1980년]] [[4월 30일]] 큰딸 베아트릭스에게 양위했다. 2004년 사망하였고 남편 베른하르트도 같은 해 12월에 사망하였다. [YouTube(cm9ftPLGZno)] [[장례식]] 거행 영상. === 가족 관련 사건사고 === 재위중에 가족과 관련된 사건사고가 많았다. 먼저 막내딸 크리스티나 공주의 시력 문제 때문에 베른하르트 공이 [[1948년]] 궁정에 소개한 '신앙치료사' '[[https://en.wikipedia.org/wiki/Greet_Hofmans|흐레이트 호프만스(Greet Hofmans)]]'(1894-1968)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여왕의 최측근으로 되면서 부부 문제에 간섭하거나 평화주의 사상을 여왕에게 주입시키려 하는 등[* 당시는 [[냉전]]시대였고 네덜란드는 [[NATO]] 가맹국이었다. 왕실에서 자녀의 건강 문제로 들어온 돌팔이가 궁정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단 점에서 네덜란드판 [[그레고리 라스푸틴]]이라는 반응도 많았다.] 여왕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8년 후에는 궁정이 두 파벌(여왕+호프만스 vs 베른하르트 공+자녀들)로 나뉘다시피 했다. (호프만스를 처음에 소개하긴 했지만 반대로 틀어진 베른하르트 공이 흘린 듯한) [[슈피겔]]지의 보도(1956.6.13)가 파문을 일으키고, 이에 빌럼 드레이스(Willem Drees) 내각이 위원회를 결성, 호프만스를 궁정에서 추방함으로써 8년간의 위기가 일단락된다. 그리고 [[1963년]]~[[1964년]] 둘째딸 이레네 공주의 부르봉-파르마 공 카를로스 우고와의 결혼 문제 때문에 홍역을 치렀고[*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에서 군주의 딸이 가톨릭 교도와 결혼한다는 것과, 그리고 카를로스 우고가 그냥 가톨릭 교도A가 아니라 스페인 왕위를 주장하는 [[보르본 왕조|카를리스타]]의 당시 수장인 하비에르의 장남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개종]]하고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며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지만 1981년에 이혼한다.], [[1965년]]에는 후계자 [[베아트릭스 여왕|베아트릭스 공주]]의 결혼 문제([[독일]] 출신의 신랑감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의 [[히틀러 유겐트|나치 소년단]] 가입 의혹) 때문에 또 한번 여론이 험악해졌다가 [[빌럼 알렉산더르]]가 태어나고 나서 겨우 진정되었다. 1970년대에는 남편 베른하르트 공이 [[록히드 사건]] 연루 의혹을 받기도 했다. == 여담 == * 셋째 딸 마르가레트의 출생이 파란만장했다. 율리아나는 공주 시절에 셋째를 임신했는데, 이 때가 2차 대전 중이어서 [[캐나다]]로 망명을 가야 했고 임신 중이던 아이는 캐나다에서 태어날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당시 캐나다에 적용되던 영국 국적법(캐나다 국적법은 1947년에 도입된다. 그 전까지 캐나다인은 영국 국적)은 [[출생지주의]]가 원칙이었던 반면, 네덜란드는 [[혈통주의]]를 원칙으로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캐나다에서 태어날 율리아나의 셋째 아이는 네덜란드-[[영국]] 이중국적자가 될 예정이었는데, 네덜란드 왕위계승법은 이중국적자의 계승을 금지한다. 태어날 아이가 딸이면 이미 언니가 둘이나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들이면 당시 아들을 우선하던 네덜란드 왕위계승법에 의해 두 누나보다 계승서열이 앞서는 동시에 이중국적자라서 계승권을 상실하는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상황이었다. 이에 캐나다 의회는 '율리아나 공주가 입원한 [[오타와]] 시민병원 산부인과병동의 병실 4칸에 캐나다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다'는 특별법을 가결했다. 이렇게 되면 해당 병실에 캐나다 법률이 미치지 못해 네덜란드의 속인주의가 적용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1943년 1월 19일에 태어난 아이가 마르가레트 공주다. 그녀의 탄생 이후 해당 특별법은 철폐되었다. 종전 후 네덜란드는 이 때의 보답으로 오타와에 튤립 구근 10만 개를 선물했고, 그 다음 해 다시 2만 개, 또 그 후로도 매년 1만 개의 튤립 구근을 계속해서 선물했다. 이후 오타와에서는 이걸 밑천 삼아서 1953년부터 [[튤립]] 축제를 열고 있다. * [[항공기 동호인]]들에게 유명한 [[신트마르턴]]의 [[프린세스 줄리아나 국제공항]]은 공주 시절에 신트마르턴을 방문한 율리아나 여왕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