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尹宣擧, 1610년 ∼ 1669년 조선 시대 후기의 유학자, 시인이다.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이다. 본관은 파평이다. == 생애 == 아버지는 윤황 어머니는 서인의 거두 [[성혼]]의 딸 창녕 성씨다. 동시기에 활약한 [[윤선도]]와 이름이 비슷하여 간혹 그와 헷갈리거나 또는 친척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아니다. 애초에 본관이 다른데, 윤선도는 해남 윤씨, 윤선거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파평 윤씨|파평 윤씨]]다. 게다가 윤선도의 '선'은 善이고, 윤선거의 '선'은 宣이다. 윤선거는 윤휴와 송시열간의 사이는 중재하려 하였지만 친구인 송시열과 함께 윤선도를 공격하거나 탄핵했다. 본래 아버지 아래에서 학문을 배워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나,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 문하에서도 수학하였으며, 그 때 [[송시열]]을 만나게 되어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된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강화도가 함락당하면 권순장, 김익겸, [[김상용]] 등과 함께 순절하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그들과 부인 이씨는 순절했으나 그는 [[남한산성]]에 있던 아버지와 함께 자살하고자 어머니와 함께 강화도를 빠져나왔다. 빠져나오는 방법이라는 것도 강화도가 청군에 점령된 상황에서 청군이 남한산성에 항복을 권유하러 보낸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 아버지는 성종의 4대손 영천군 이정(靈川君 李侹)이며, 어머니는 상주 김씨(尙州金氏)로 좌의정 김귀영(金貴榮)의 딸이다. 아내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인조의 비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이복동생(孽妹)이다. 윤선거와는 한 동네에서 살았다고.]의 종자인 선복(宣卜)이라고 신분을 속여서 강화도를 빠져나오게 되었다. 이 때 아들 [[윤증]]과 딸을 두고 나왔는데 그의 딸은 노비로 팔려나갔지만 윤증이 족보를 쓴 수첩을 주고 외우게 하여서 구제되었다고 한다. 윤선거는 강화도를 빠져나왔지만 결국 순절하지 못해서 이후 여러 차례 벼슬에 불려나왔으나 이 때의 일로 인해 나가지 않았다. 참고로 이 때의 일을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송시열]]이 상당히 경멸했다고 하며[* 송시열의 큰형 송시희는 1627년 [[정묘호란]] 때 [[전사]]했고 형수 김씨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다 뒤따라갔다. 아버지 송갑조는 국치를 당한 슬픔에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상처가 더해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종형 송시영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목숨을 끊었다. 호란으로 가족을 잃은 송시열 입장에선 죽자고 결의까지 해놓고 살아나온 윤선거가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강화도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자녀들을 놔두고 나오면서 자신을 노비 신분으로 속이기까지 했으니 더했을 듯. ] 아들 [[윤증]]에게도 역시 이 때의 일이 상당한 멍에로 자리 잡게 된다. [[남인]]이었으나 교류가 있었던 [[윤휴]]가 "사물의 진리를 주자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 있느냐"는 발언을 하자 그는 1653년 송시열, 이유태, 권시, 유계 등과 함께 황산서원에 모여 논의를 하게 되는데 이 때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과 같다며 비난하자 그는 윤휴를 옹호하였고, 이후에도 역시 지속적으로 윤휴를 옹호하자 송시열과 급속도로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1669년 세상을 떠났는데 별세하기 몇 달 전 송시열에게 “남인 윤휴와 허적을 '참람한 무리'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를 버리고 폭넓게 생각하라”란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가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그의 묘갈명을 부탁하면서 같이 전달해 알려지게 되었고, 송시열은 편지에 대해 노여워하며 조문에 병자호란 때 자결한 처를 두고 도망쳐나온 일을 가지고 야유하는 묘갈명을 적어주었다. 이에 대해 윤증이 여러번 수정을 부탁했으나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는 윤증과 송시열이 척을 지고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분류:조선/인물]][[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파평 윤씨]][[분류:1610년 출생]][[분류:1669년 사망]]